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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소년 Jul 21. 2022

역사 이야기 오늘의 역사는? 7월 19일(보불 전쟁,


#7월19일 #보불전쟁 #나폴레옹3세 #프랑스 #비스마르크


반갑습니다  갬성입니다!


오늘의 역사는 보불 전쟁(나폴레옹 3세의 몰락)입니다



1. 1848년 혼란의 연속... 




보나파르트 3세의 삼촌은 나폴레옹 1세였습니다.

나폴레옹 3세의 삼촌은 그 유명한 프랑스의 영웅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입니다. 그는 등장부터 자신의 삼촌 후광을 많이 받았죠. 그리고 당시 제2공화국이 들어섰을 무렵, 공산주의 폭동 등 사회혼란이 계속 이어지자 나폴레옹 재위 시절의 평화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일어난 공산주의 폭동은 실로 엄청나서 1848년 4월 보통 선거로 선출된 제헌 의회 의원들을 부정하는 6월 폭동이 일어났는다. 이것이 실패로 끝난 후 추방당한 사람이 약 1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러한 폭동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의 혼란을 원치 않고 오히려 안전했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시기를 그리워했죠. 그때 마침 1840년 나폴레옹의 유해까지 프랑스로 온 상황이었습니다. 보나파르트에 대한 향수가 더 짙어갈 때쯤 치러진 선거. 놀랍게도 1848년 선거 결과, 득표율 70%로 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2. 나폴레옹 3세의 독재 




1)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의 보나파르트


 사실 나폴레옹 3세는 그전까지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836년 스트라스부르그의 프랑스군 막사에서 루이 필립에 대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다가 붙잡혔으나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삼촌 나폴레옹 1세의 엘바 섬 탈출을 흉내 내서 1840년 프랑스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감방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법정에서 그는 공식적으로 국민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가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상드(George Sand)와 같은 여류문인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러다가 1864년 목수로 탈옥하여 영국으로 망명한 후 ='나폴레옹 사상'을 저술하였고, '빈곤의 추방'에서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취향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2) 제2제정의 시작 


보나파르트 3세를 신격화한 그림

그는 1848년 대통령에 당신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삼촌에 따라서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 싶던 나폴레옹 3세는 중임 제한이 너무나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개헌을 시도했지만 국회의원 4/3을 넘기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죠. 이에 그는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날은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기도 했습니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이후 계엄령을 통해 완전히 프랑스를 장악했죠. 그리고 이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국민들은 대통령 임기 10년 연장을 승인했고, 결국 나폴레옹 3세는 황제 지위에 오르게 되었죠. 



3) 그의 내치 


나폴레옹 3세의 정치는 나폴레옹 1세와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제휴, 평화와 전쟁을 병행하는 양면 정책, 식민제국 건설, 이탈리아와 러시아 원정 등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영역에서는 성공을 거둔 부분도 있었습니다. 바로 경제입니다. 나폴레옹은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철도, 운하, 항만 등의 건설 사업을 일으켰고, 상업과 농업을 팽창시켰습니다. 동시에 식민제국 건설을 도모하였죠. 어느 정도의 산업화도 도모하여 이 시기 프랑스 파리에서는 1855년 세계 박람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프랑스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도시로 변모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유는 극도로 억압했습니다 비밀경찰을 통해서 위험분자들을 색출하고 언론을 검열했으며 입법부는 황제의 지지자들로 가득 채워진 허수아비였습니다.



4) 그의 외치 

크림전쟁 중


하지만 그는 외교에 있어서는 형편없었습니다. 일단 영국과 같이 연합하여 청을 공격하여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동시에 크림전쟁을 통해서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도 했죠. 그리고 크림전쟁에서 같이 연합하였던 사르데냐와 밀약을 통해서 이탈리아 내 오스트리아 세력을 물리치는 대가로 니스와 사보아를 얻기로 협약했죠. 근데 문제는 이 사르데냐가 주도하는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중도에 하차해버립니다. 이는 당시 민족주의 및 자유주의를 열망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상실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한 니스와 사보아를 준 사르데냐... 당신은 진심 레알 대인배. 


 그리고 다음 멕시코 원정이었습니다. 멕시코는 당시 공화정이었는데 이를 강제로 침탈하여 자신의 삼촌을 황제로 임명해 보리고 제정을 선포해버립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자유주의자들의 반발을 야기했죠. 그리고 자신의 삼촌 막시밀리안 공 역시 멕시코 자유주의자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총살당해 죽습니다. 멕시코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프랑스 내 빈 세력만 획득했죠. 


 그리고 독일과의 전쟁이었습니다. 




3. 독일의 영웅 비스마르크와의 갈등


당시 독일의 재상은 비스마르크였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당시 분열되어 있던 독일 제국을 통일할 수 있는 것은 펜이 아닌 철혈(무기)란 말하에 군수 물자를 증산하고 군사력을 길렀습니다. 그리고 첫 독일 통일을 위한 여정으로 오스트리아 격파를 도모했는데요. 놀랍게도 이 프로이센의 재상의 주도하에 당시 국제 무대를 주도했던 오스트리아는 7주 만에 박살이 나버립니다. 이 덕분에 독일연방의 주도권이 프로이센으로 넘어가죠. 이때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전쟁 전 중립을 지키겠다는 밀약을 맺은 상태였죠. 하지만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중립은 임시방편이었습니다. 중립을 조건으로 준다고 약속했던 벨기에, 스위스 일부, 룩셈부르크 등 그 어느 땅도 주지 않았습니다. 아마 의도적으로 프랑스의 반독감정을 야기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후 비스마르크는 북부 독일연방을 결성하여 북부 독일의 여러 영 방 국들을 가입케 합니다. 그리고 독일의 진짜 통일을 위해서는 향후 견제세력이 될 수 있는 프랑스를 격파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것을 바로 도모합니다.


 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했던 것이 엠스 전보사건입니다. 이는 당시 에스파냐 왕위 계승을 두고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는데요. 프로이센은 당시 합스부르크 예에서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습니다. 이때 프랑스에서 대사가 프로이센의 황제 빌헬름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빌헬름은 엠스 온천에서 목욕을 즐기고 있었는데요. 이 상태의 황제를 찾아간 대사. 그 이후의 전말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이 사건을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다음과 같이요.





프랑스 대사가 우리 황제를 모욕하였다!!






이는 곧 프로이센 사람들로 하여금 방불 감정을 야기했고 곧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전쟁은....



4. 참담한 보불 전쟁. 


포로가 된 보나파르트 3세(좌)와 옆에 앉은 비스마르크(우)


프로이센의 완승으로 끝나버립니다. 1870년 7월에 선전포고를 한 프랑스는 의기양양하게 출발했으나 바로 9월에 세당에서 항복을 해버립니다. 황제는 포로가 되었고 빈 공석 상태에서 당시 입법부는 공화정을 선포합니다(제3공화정) 그리고 약 4개월간 저항했으나 프로이센의 강력한 군사력을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파리는 항복합니다. 이후 맺어진 프랑크푸르트 조약에서 알자스 및 로렌 일부를 프로이센에 양도하게 되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더 수치스러운 것은 이후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을 탄생시켰는데 그 황제 즉위식을 프랑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거행했습니다. 









5. 내 생각 


자세히 보면 나폴레옹 3세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너무 비슷합니다. 그렇게 큰 업적도 없이 아버지의 후광으로 살아왔던 인생이었고, 대통령 즉위 이후에도 비선을 등용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국정철학 면이나 외교적인 참사가 한 둘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 사드 사태 등의 외교 문제와 세월호 사건에서 보여준 행정 문제 등 총체적 난국이었던 박근혜 대통령 시기의 모습이 보나파르트 3세의 모습과 참 유사합니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불안정성을 갖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는 동시에 성장을 하지요. 오늘은 보불 전쟁이 일어난 지 152년이 지난해입니다. 다시 한번 보나파르트를 통해서 무능한 지도자를 뽑았을 때 어떤 결과를 국민들이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되는 좋은 역사라고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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