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백제멸망 #의자왕 #해동증자 #나당연합군 #7월18일 #718
반갑습니다 잇님들 갬성입니다!
오늘의 역사는 백제 멸망입니다!
의자왕은 초창기 백제의 제 3의 전성기를 알리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무왕의 맏아들로서 해동증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형제와의 우애도 돈독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 지극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지성에 무예까지 갖춘 이였기에 그 누구도 의자왕 시기에 나라가 멸망할 것이란 것을 예측하지 못했죠.....
의자왕은 641년 즉위하여 바로 왕권강화를 위한 대규모 숙청작업을 하기에 이릅니다. 배다른 동생 교기, 내좌평 기미등을 섬으로 추방시켰죠. 그리고 지방의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로한 후 642년부터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40여개 성을 함락시킵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북방을 안정시킨 다음 신라를 공격하여 40여개의 성을 함락시키죠. 말이 40여개성이지, 과거 진흥왕으로부터 뺏긴 대부분의 땅을 뺏고 요지 중에 요지인 대야성을 점거함으로서 신라의 숨통을 거의 끊어 놓은듯 했습니다. 그리고 대야성 전투에서 김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를 죽이는데, 여기서 고타수는 훗날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딸이었습니다. 자신의 딸이 죽음을 당했다는 말을 들은 김춘추는 역사서에 따르면
춘추는 딸의 죽음을 듣고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삼국사기 제 5권 신라본기 선덕여왕 )
매미처럼 기둥에 가만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충격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김춘추는 복수를 위해 먼저 고구려로 갑니다. 고구려의 당시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동맹 제안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고구려와 백제는 당항성을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이 것을 계기로 여제 동맹이 형성됩니다. 여제 동맹 속에서 백제 의자왕은 고구려에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습니다. 당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에 대해 지원을 하지 않고, 신라를 공격하여 7성을 뺏었으니까요. 외교적으로 실리적인 노선을 선택한 의자왕. 그의 초기 재위 기간 15년까지는 분명 현군 모드였습니다.
거의 신라를 멸망직전까지 가게 했던 현명한 의자왕의 전성기는 재위 15년(655년)이후로 끝나게 됩니다. 이 때부터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면서 정사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활약했던 것이 왕비 은고였습니다. 은고는 기록에 따르면 요부, 요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자왕의 눈과 귀를 멀게 하였으며 정치를 좌지우지 하는 실권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의자왕은 자신의 아들들, 왕서자들 41명에게 관직과 식읍을 제공하는데 이로서 관료체계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고 기존의 6좌평제가 사실상 폐지되기에 이르죠. 이에 충신 성충이 간언을 했고, 이에 의자왕은 성충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성충은 감옥에서 죽게 되죠.
의자왕의 실정이 계속되는 사이, 신라의 김춘추는 당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고 있었습니다. 648년부터 계속 이어져온 김춘추의 대당 외교는 결국 결실을 맺어 당이 고구려가 아닌 백제를 먼저 공격하는 것을 설득하기에 이릅니다. 658년 고구려 2차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당은 660년 소정방으로 하여금 백제를 공격합니다.
이 시기,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급히 성충과 홍수를 찾은 의자왕. 성충이 그제서야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홍수 또한 당시 유배지에 있었죠. 홍수는 당나라를 육지로는 탄현, 물길로는 백강에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죠.
이에 계백을 보내 신라의 5만 병력을 막게 했습니다. 계백은 5만의 대병력에 맞서서 8천의 결사대로 무려 4차례나 방어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패배하게 됩니다. 수군 역시 소정방과 김인문이 이끄는 15만의 대병력에게 기벌포에서 대패하게 되죠. 결국 의자왕은 이 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항복을 하게 되었고 백제는 멸망하게 됩니다.
백제의 멸망 과정은 한반도사에 있어서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신라의 나당동맹은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하지만 기록을 보면 특히 문무왕의 경우 당의 침략을 어느정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외세를 끌어들여서 불완전한 통일을 하고, 다시 외세를 막는 2번의 방어전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백제와 고구려의 국운이 쇠해지는 기간 동안(650년 이후) 국력을 길러서 자력으로 백제를 공격했던 것이 훨씬 더 현명하지 않았나 싶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도 고구려는 결국 내분으로 멸망하게 되었고, 의자왕 역시 정치에서 관심이 멀어지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어쨋든 신라는 당을 선택했고, 당까지 몰아냄으로써 불완전하지만 어쩃든간 삼국통일을 완성하게 됩니다.
백제의 멸망과정은 위정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죠. 견제가 없는 측근, 독재 정치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 것도 어리석은 리더가 나라를 맡고 경영할 경우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백제가 멸망한지 1362년이 지난 날입니다. 백제 멸망의 교훈을 잘 새기면서 좀 더 나은 대한민국이 되길 기대합니다! 이상으로 포스팅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