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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소년 Mar 25. 2024

건국전쟁 반박[4.3사건의 학살은 정당하다고?!]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방법을 43사건을 통해서 생각하다

저번 시간에 이어 이번에는 43사건에 대한 왜곡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전에 우리나라의 문화적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네이버이미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승만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그의 행적이 대한민국의 어떤 성격을 결정짓는데 굉장히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반공 자유주의로 둔갑되는 그의 독재 행렬로 인해서 그를 옹호하는 자유당이 만들어졌고, 그의 반대파 세력들이 결집하여 만든 민주당이 만들어 졌다. 자유당의 경우 반공을 국시로하면서 동시에 군사 독재를 옹호한다.





네이버 이미지



민주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조병옥은 원래 이승만의 오른팔이었고, 경무국장으로서 43사건 진압을 주도하였었다. 그의 행적은 민주당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자유당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과정은 전혀 민주스럽지 않다.


자유당의 후신인 국민의 힘

반면 지주 관료 출신이 만든 한민당의 경우 반공을 국시로 하지만 민주주의의 원리는 조금 인정하는 편이다.


한민당의 후신인 더불어 민주당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진보당이 있었지만 조봉암의 사형으로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조봉암사건으로 진짜 진보는 거의 몰살되다 싶이 하였다. 이후 민주당 계열로 합류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이 자유당 계열과 민주당 계열이 계속 명맥을 이어온 거대 양당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 주변에서 하는 '우리나라엔 완전한 보수도 없고 진보도 없다'란 말은 맞는 말이다.


보통 진보라하면 사회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습을 띄는데, 대한민국에서는 진보당 사건이후 완전히 그 자취가 없어졌기 때문에 진보는 사라졌고, 보수가 진보가 되고 수구가 보수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유례없는 신 자유주의의 최극단 영역에 미국과 나란히 한국이 들어간다.


우리나라에 유독 시장 경쟁 시스템이 사회, 경제, 문화 각 영역에 많이 들어가있는 이유는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대 양당모두 시장경제체제, 신자유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거대 양당이기에 신 자유주의가 가속화되는 일만 남았다. 그 뿐이다...



어쨋든 그렇다. 대한민국의 정치적 기원은 바로 이승만이다. 이승만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로 인해서 정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것을 결정한 결정적 사건이 바로 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이다. 우리가 말하기 전에 사건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을 받을 만한 뜻밖의 일.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43사건의 피해자들(출처:위키백과)



사회적 문제를 의미한다. 즉 논란이 되는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에서는 성격을 정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민중들이 어떤 부당한 권력에 맞서서 벌였던 사회운동을 항쟁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이를 통해서 새로운 권력을 형성하면 혁명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반면에 특정 정치적 집단이 부당한 방법을 통해서 권력을 사유화하는 과정을 우리는 반란, 모반, 쿠데타라 하기도 한다. 하지만 4.3사건은 유독 정의하지 않는다. 사건이라한다. 그 만큼 다양한 세력이 개입하였고 그 전개과정이 복잡하기에 특정 성격으로 규정하기 힘들다는 표현이다. 그 만큼 43사건을 무엇이라 정의하기 애매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이 과정에서 수 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1/3의 사람들이 좌익과 전혀 상관없는 어린이와 60세 이상의 노약자라는 사실이다. 이런 것을 외면한채 건국전쟁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4.3사건과 여순사건은 남로당의 기획이고 학살에 중중하면 안된다. 4.3사건이나 여순반란 사건이나 다 510총선을 막으려는 남로당의 계획이 있었고......(중략) 피해자에 집중하다 보니까, 피해자의 모든 것들을 정당화합니다.   

                                  영화 건국전쟁 중 일부 발췌



그러면서 동시에 건국전쟁의 제작진은 4.3사건을 김달삼과 관련시켜서 폭동으로 규정지어 버린다. 그러니 4.3사건을 진압하는 것은 내란을 진압하는 행위였고 피해자의 죽음은 정당하다는 논리다. 하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일단 전개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1. 4.3사건의 전개


1948년 해방 이후 제주도 시가의 모습(출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정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 자체적으로 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있긴 했었지만 우리나라는 냉전의 한 가운데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이데올로기 대립이 형성되었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그리고 민족운동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 성향, 목적에 맞게 사회 조직을 만들어 정치,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문제는 기존의 친일파가 전혀 청산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일이다. 당시 친일파는 사람들에게 정말 '나쁜 놈' 그 자체였다.


일본 제국주의 권력에 기생하여 마을 내에서 횡포를 부리며, 민족 구성원들을 핍박하고 전쟁터에 동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인간들의 집합소였다. 당연히 민중들의 입장에서 그 들이 여전히 행정, 치안을 담당하는 것을 달갑지 않은 사실이었다.





고문왕 노덕술은 해방 후, 경찰관료로서 여전히 활동하였다. 경찰, 군인 조직은 친일파가 가장 많은 영역이었다. (출처:네이버 이미지)



그렇기 때문에 대구의 경우 10월 항쟁의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져 경북 영천 지역에 친일파들이 대거 숙청되는 등의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제주도 마찬가지였다. 해방은 되었지만 친일파들이 여전히 경찰 관료로 활동 중이었다. 그런 모습을 사람들은 달갑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46년 3월 제 27회 3.1기념식이 열렸었다. 그 과정에서 친일파 출신의 경찰 관료들과 민중들이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어린 아이가 사망하였다. 이 것이 계기가 되어 사람들은 경찰들에게 사과를 요청하며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의 발포가 발생하였고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제주북교 5학년생이었던 15세의 허두용, 21세 여성 박재옥을 비롯한 민간인이었다. 문제는 이 들이 광장 복판에 쓰러진 것이 아닌, 도립병원으로 가는 골목 모퉁이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총알도 등 뒤에 박혀 있었던 채로(1명 제외). 즉 적극적으로 경찰에 대항해 시위했던 사람들도 아니었던 민간인들에게 무리하게 대응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소요가 제주도 내에서 하루 이틀 간격으로 계속 일어났다. 결국 제주도 내에서 3월 10일 총파업이 일어났다. 약 166개의 단체에서 4만 1,211명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병옥 경무국장은




제주도민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니건국에 저해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


                                                                경무국장 조병옥






라 말하며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였다. 결국 파업은 오래가지 않아 주춤해졌지만 공권력의 강경대응은 지속되었다. 3/18일에는 200여명, 3월 말에는 300여명, 4월 10일에는 500명을 검거하였다. 이때부터 갈등이 심화되어 좌익계열의 청년들과 결찰들의 무력충돌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48년 5월 10일 남한 내 단독정부가 들어선다는 말에 좌익계 김달삼이 개입하여 민중들을 선동하게 되었다. 김달삼에게 선동된 일부 민중들은 남로당원으로서 320명의 유격대를 편성하여 4월 3일 23개의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를 습격하여 순경들과 무고한 그의 가족들이 무참하게 죽었다. 그 후 약 2개월 동안 경찰 55명, 좌익청년 144명이 사살되었다. 결국 미군정은 제주도의 경찰력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청년단을 증파하여 강력하게 진압할 것을 명한다.  당시 딘 군정장관의 지시가 아래와 같이 내려졌었다.





제주도의 폭도들을 진압하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군부대를 이용하라. 공격에 임하기 전에 귀관은 소요집단의 지도자와 접촉해서 그들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하라. 경비대의 작전에 의해 붙잡힌 포로들은 경찰에게 인계하지 말라

-딘 군정장관


딘 군정장관(출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이 때 당시 좌익 무장대와 평화 협상을 한 주체가 김익렬이었다. 김익렬 4월 28일 다정명 구억리에서 김달삼과 만나 합의를 보았다. 그 핵심 내용은 아래와 같다.



김익렬 국방격비대 제 9연대장






남로당의 제주도 실질적인 주도자였던 김달삼


1.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2. 무장해제는 점차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3.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은 보장한다

단박에 한국사 -심용환


하지만 이 평화협상은 3일을 넘기지 못하고 깨졌다. 대동청년단원 30명이 좌익 계열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불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김익렬이 직접 마을을 방문해 현장 조사를 벌여 미군정에 보고하지만 미군정은 묵살한다. 이에 김익렬은 자체적으로 방화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을 구금 조치해버린다.


출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하지만 5/3일 평화협상에 따라 산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이 총격을 받아 사망한다. 김익렬은 이 주동자를 잡아 심문한 결과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해 폭도들의 귀순공작을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하지만 이 때 5.5일 조병옥 경무국장은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연대장을 박진경으로 교체하였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진압작전이 시작된다.



11월부터 대대적인 초토화작전이 시작되었다. 사진은 43사건 과정에서 체포된 수용자들(출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그리고 이 때부터 그해 12월까지 일방적인 민간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제주도 주둔 연대장은 11월20일부터 11월27일까지 122명의 반란자들을 생포했고, 576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10월 1일에서 11월 20일 사이에는 1,625명을 사살했고 1,383명을 생포했다고 보고했다. 많은 물건들이 노획되었으나 무기는 약간의 일본식 소총이 노획되었을 뿐이다. 2개월 동안 총 60여 개의 무기가 노획되었다.

심용환 단박에 한국사 180P


출처: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그리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부터 본격적인 집압작전이 시작되었는데, 그 양상은 초토화작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대대적으로 파견한 후에, 포고령을 내렸다. 그 포고령은 다음과 같다.



출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

제 9연대장 송요찬 소령


그리고 이후 중산간 지역의 주민에 대해서 소개령을 내려 해안지역으로 강제 사민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포고령을 전달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중산간지역에 다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압군은 11월 17일 계엄령을 실시한 후에 4개월동안 중산간 마음 95%를 방화시켰고, 11월 달에만 약 4,000명을 학살하였다.


뿐만아니라 정부의 소개령에 따라서 해안마을에 내려온 사람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형무소에 보내지거나, 사살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자 이를 피하려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 피난민들이 늘어나고, 이 피난민들을 학살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유재홍 사령관의 선무귀순작전에 의해서 하산한 사람들(출처: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그러나 6 · 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 · 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 · 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 · 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 · 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2. 피해 상황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 · 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 · 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2011. 1. 26 현재), 희생자로 14,032명이 보고되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위는 제주도의회에서 94년부터 2000년까지 약 6년간 조사한 피해자 상황이다. 10세 이하가 676명, 그리고 61세 이상이 706명이 사망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약 2,000명이 넘는 여성가지 죽었다. 그리고 위의 사례를 본격적으로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던 48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포획된 소총이 60여정이라 한다. 결국 정규군이라 해도, 아무리 많이 계산해도 500명이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장대와 토벌대 사이에서 약 12,000명이 학살당한 너무나도 가혹하고 슬픈 일이었던 것이다.





3. 나의 결론



랑케(출처: 네이버 이미지)
본래 그것이 어떻게 있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역사이다.
-역사학자 랑케


역사학자 랑케는 위와 같은 말을 했고 나 역시도 객과적인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역사 연구를 할 때, 해당 사건과 관련된 많은 사료들을 최대한 많이 모으고, 각계 각층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해석을 하여 총체적으로 합의를 내리는 과정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의 건국전쟁 감독인 김덕영씨는 그 것을 어겼다. 자신이 말했듯, 특정 입장에서 이야기함으로서 그 입장의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안된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그러므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1980년대까지 이미 가해자의 입장은 충분히 잘 다뤄왔다는 것이다. 그 들의 의도대로 43사건은 폭동이었었고, 민간인들이 알아서는 안되는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 이후 겨우 피해자의 입장이 전달되었고 숨겨져왔던 진실들이 밝혀졌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을 고려해서 1948년 4월 3일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각계 각층의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개입된 복잡한 일인 사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에서 총체적으로 연구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43사건이다. 감독이 말했듯이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다뤄서는 안되지만 가해자의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것도 안된다. 그 것은 가해자의 입장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다. 가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보는 것은 가장 선전선동이 쉽기 때문이다.  결국 김감독의 말의 논리는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버리면 반박이 모두 가능하다. 그런식으로 한다면 아래와 같은 말이 만들어 진다


가해자에 집중하다 보니까 가해자의 모든 것들을 정당화합니다.

-감성소년




12,000명의 공식적인 피해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 경의 피해 상황만  이야기한다면 그 것을 보는 사람들은 43사건의 진실을 모른채 감독의 조작된 선동에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그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 해당 사건을 그 시대의 흐름속에서 파악함으로서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등을 이해하여, 이해력을 기르기 위함이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43사건의 수많은 피해자들의 상황을 무시하고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만 오인하게 되는 것은 정말 역사에 대한 범죄라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이 것은 민간인을 학살한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지 않음으로서 다가오는 역사에서 또 다른 잘못된 결정을 야기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여러모로 이 건국전쟁에서 표방하는 잘못된 역사는 잘못된 것이며 진실된 역사,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역사를 안다'의 의미를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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