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성소년 Mar 12. 2024

이승만이 왜 런승만이라고 말을 못해?

건국전쟁을 보며 대한민국의 현세태를 한탄하다 (뉴라이트 전성기)

한탄스럽고, 한숨이나오고 너무도 슬픈 현실이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은 뉴라이트 전성기이다. 과거 1980년대 후반 안병직 선생이 창립한 낙성대 연구소에서 발원된 뉴라이트는 2005년 이영훈씨에 의해서 활성화 되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활동하지는 않았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하지만 현재 영화 '건국전쟁'이 개봉되었고 그 곳에 100만명이 갈 정도로 역사학의 한 주류가 되는 세태를 보며 정말 역사교육과 출신으로서 눈물이나오고 현세태가 너무도 가슴아리다. 대한민국에는 정말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주권을 지키고자 하였던 정말로 대단하신 분들이 많다. 백범 김구선생님, 도산 안창호 선생님, 여운형 선생님등.. 그런데 왜 그 많고 많은 독립운동가를 두고 이승만전대통령을 골라서 역사를 조작하면서까지 이러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 들의 주장은 왜 틀렸는가.




1. '이승만으로 인해서 의회정치가 만개하였고 장기집권을 했지 독재는 하지 않았다. '

건국전쟁에서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독재는 아니예요. 장기집권이죠. 지금 돌이켜보면 노태우 정부 다음으로 의회의 자유가 만개했던 것이 이승만 정권이거든요, 이 시대를 독재 정권이라고 하는 것이 말이 안되죠  
-영화 건국전쟁-


일단 이에 대해서 반박하기 전에 의회정치, 즉 대의민주정치의 사전적 정의부터 알아보겠다.


대의민주정치: 시민이 선출한 대표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대의 민주정치라고도 한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정치 형태이다. 민주정치의 이상은 시민이 직접 주권을 행사하는 직접 민주정치에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으나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공공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모든 시민이 한곳에 모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국회의원이나 지방의회의원 등의 대표자를 선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대신 공공의사를 결정하게 하는 대의 민주정치를 보편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간접 민주정치 [間接民主政治] (Basic 고교생을 위한 정치경제 용어사전, 2002. 9. 25., 서경원)


여기서 핵심은

  1. 시민이 직접 자신을 대신할 대표자를 선출할 수 있고
  2. 이렇게 선출된 대표자는 공공의사를 결정할 수 있음
  3. 기타 출판,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음

3가지 조건이 따른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정확하게 이 2가지 요소를 모두 어겼다. 시민이 대표자를 선출할 권리인 선거권을 4.19부정선거에서, 그리고 공직 선거 후보자에 나설 수 있는 피선거권의 경우 최능진의 사례를 보면 된다.


1-1) 그는 피선거권을 탄압하였다. (최능진의 사례)

출처: 네이버 이미지

최능진은 과거 미주에서 흥사단에 같이 활동한 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의 엄청난 활약으로 각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열되는 모습을 목격한 이후 반이승만 노선을 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방 후, 그는 이승만 전대통령의 행보를 보고,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해서 크게 반대하고 있었기에, 194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입후보 신청을 한 서울 동대문 갑 선거구에 입후보를 신청하여 이승만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막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당시 이승만은 상당히 그를 경계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은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서북청년단을 동원하여 최능진의 입후보를 방해하였다. 먼저 선거 등록 요건에 필요한 200명의 추천서를 인준받는 과정에서 훼방을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최능진의 운동원들이 추천서를 받으면 서북청년단을 이용하여 뺏어버리는 것이 두 번째였다.

출처: 위키백과 서북청년회

 그렇게 최능진은 동대문구에 입후보하는 것에 실패하였고, 이승만은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후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역시 반대파에 대해 대단히 살벅한 경계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최능진을 가만 두지 않았다. 1948년 10월 그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후, 수도경청 형사대에 이끌려가서 수사를 받았고, 그 결과 '혁명의용군 사건', 즉 그가 국방경비대를 이끌고 반란을 획책하였다는 1심과 2심을 거쳐 징역 5년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던 와중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의해서 출소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서 월북할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남한에 남았고, 남한에 남았던 그는 그를 수감하였던 김창룡에게 다시 체포되어 1951년 처형당하였다.


이 사례는 명백히 피선거권을 이승만이 박탈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2) 선거권을 박탈하였다 (3.15부정선거를 통해서 보는 사례)


그리고 3.15부정선거.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선거권을 갖고 있으며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1960년 3.15일 이승만은 그의 후계자인 이기붕에게 권력을 인계하고자 하였지만, 인기없던 이기붕이 장면에게 밀리는 것을 보고는 부정선거를 단행한다. 4할 사전투표, '3~9명씩 짝지어서 기표케 하는 방식(3인조, 9인조 투표), 그리고 투표함 바꿔치기까지 세계 유례없는 정말 부정선거의 전형이 될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무부장관 최인규(崔仁圭)는 전국경찰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일선 경찰서장을 연고지 중심으로 재배치시키고, 이어서 전국 시 · 읍 · 면 · 동 단위로 공무원친목회를 조직하는 등 득표를 위한 활동을 지시하였다.


또한, 내무부는 11월부터 다음해 2월 사이에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다음과 같은 구체적 부정선거 방법을 극비리에 지시하였다. 즉, ① 4할 사전투표, ②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③ 완장부대 활용, ④ 야당참관인 축출 등을 통하여 자유당후보의 득표율을 85%까지 올린다는 것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15부정선거 부분인용


  정말 역대 최악의 부정선거가 이뤄짐과 동시에 이승만정부는 '대한반공청년단'이란 자신의 정치 비호 세력들, 그리고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 깡패들을 미리 대기시키며, 자칫 잘못될시 바로 폭력적으로 이를 강행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뿐만인가. 장면의 연설을 방해하고자, 학생들을 일요일에 등교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고, 정치 깡패들을 동원하여 전남 여수, 광산등지에 민주당 간부를 구타하기도 했었다. 정말 최악의 정치 사태에 대해서 정말 이 모든 것들이 단지 이기붕의 소행일뿐, 이승만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래 이까지는 몰랐다고 치자.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315부정선거 과정에서 마산의 학생들이 시위도중 한 학생이 사망하였다. 그 학생의 이름은 김주열. 김주열 열사는 최루탄에 맞고 사망하였고, 당시 마산 경찰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마산 앞바다에 유기하였다. 하지만 시체는 27일만에 떠오르게 되었고 이에 시위는 더욱더 확산되었다. 서울까지 확대되었고, 학생, 대학생, 그리고 시민, 대학교수까지 번지게 되었다. 대학교수들은 시국선언을 하게되었고, 이 과정에서 고려대학 학생이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하여 부정선거를 해명하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를 정치 깡패들이 습격하였고, 폭력사태로 이어졌다. 곧 419혁명으로 이어졌는데, 이 때 중요한 것은 이 시민군들을 계엄군이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그 어떠한 진상규명도 없이, 시위를 폭력적으로 막기 위해서 계엄군이 투입된다... 바보가 아닌 이상, 군통수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대통령은 몰랐고, 이기붕만이 알고 있었으니까 부통령의 소행이지 대통령의 소행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제발.... 419혁명 과정에서 돌아가신 순국열사들한테 반성해라. 제발...


그리고 이 사살에 대해서 이후 315부정선거 관련 법정 내용에 최인규 내무부장관이 1959년부터 이미 아래와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 어떠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역사상 대통령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 놓고 보아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 국가대업 수행을 위하여 지시하는 것이니 군수 서장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

-출처: 국가기록원







또 이승만은 대통령 담화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정부통령은 같은 정당 소속으로 선출되어야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번 3.15선거에서는 각각 의견이 다른 사람이 정, 부통령으로 피선된다면 '나는 그 것을 응종할 수 없다'
-출처: 황현필 역사강의 유튜브 -동아일보 게시글




그렇다 그는 이미 이 315부정선거를 원했고 알고 있었다. 1959년부터 행정부 소속 내무부가 지시한 사항을 대통령이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사실이다. 결국 이 모든 소행은 이승만의 의지대로 이뤄진 것이고, 그렇기에 이에 저항했던 419혁명에 대해서도 진상규명없이 바로 계엄군 투입과 정치깡패 동원이라는 물리력 동원을 통해서 잠재우려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이 사실에 대해서 몰랐고, 그리고 동시에 315부정선거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라면 왜 419혁명에 대해서 물리력을 동원하여 진압시키려 했다는 것인가?  만약 여기서 '이승만은 몰랐는데 어쩔 수없이 사회 질서를 위해 진압했다'고 말한다면........정말 할 말이 없다.





1-3) 그는 국회의원의 자유 및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바탁하였다. (조봉암 사건과 경향신문 폐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례)


여기서 정말 그의 행보는 놀라울 정도다. 그의 의회탄압을 이야기하자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의회 탄압은 거의 어린 아이 수준이 되어버린다. 그는 일단 1952년 부산정치 파동을 통해서 자신의 임기연장을 위한 발췌개헌을 통과하였다. 놀라운 사실은 전쟁 중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1952년 자신의 반대세력이 의회 내 많다는 사실을 안 이승만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을 위해서 헌법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여야의원들을 불렀는데, 이 과정에서 조폭들, 경찰, 군인까지 동원하여 야당의원들을 탄압하였고, 개헌 투표 과정에서 살벌한 감시하에 거수 투표로 진행하여 의원들의 자유권을 탄압하였다. 뿐만아니다. 그는 1956년 대선과정에서 자신에게 정치적 위협을 준 조봉암에 대해서 갖가지 탄압 작전을 벌인다. 진보당 결성과정에서 '경남도당 결성대회', 그리고 '서울, 경기도당부 결성대회', '서울시경 경관대', '전남도당 결성대회'에서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대회를 폭력, 무력해산시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중환, 임춘호등 진보당 의원들이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다. 전북도당 결성 과정에서는 윤길중 양해룡, 전세룡이 납치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1958년 부장검사 조인구가 기자간담회를 열어 진보당의 평화통이론을 공식적으로 문제삼는다.


평화통일이란 북한의 적화통일 방편에 불과하다. 즉, 김일성의 지령이 진보당의 정강정책이다

조인구 부장검사(출처: 심용환 단박에 한국사)


출처: 네이버 이미지

그렇게 시작된 일명 진보당 사건. 이 것을 기점으로 1월 12일 박기출, 윤길중을 시작으로 1월 13일 조봉암, 김달호를 구속하였다. 미리 조작된 조봉암의 김일성에 대한 친필편지가 집에서 발견되었고, 재판이 열릴게 되었다. 하지만 법원에서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서 무죄가 선고되자 다시 정치깡패들 300명이 동원되어 난동을 부린다.

그리고 다시 열린 재판에서 사형으로 판결되어 결국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경향신문'이 폐간되었고, 대구매일신문사는 습격을 당하게 되는데, 본격적인 언론탄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진보당 사건은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로 판결나게 되었으며, 이는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서 조작된 사건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당 활동, 언론 활동이 완전히 탄압되었다. 그리고 부산 정치 파동과정에서 봤다 싶이 야당의원들은 당시 서북청년단 출신의 대한방공청년회의 탄압, 군인들의 탄압, 경찰들의 탄압등으로 인해서 거의 숨도 못쉬었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사사오입 헌법 개정과 같은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도대체 헌법개정 과정에서 비밀 투표가 아닌, 군인, 경찰들 동원하에 거수 투표로 결정되는 것이 의회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릴 수 있는지 정말 의문스럽다...





2. 빤스런 이승만이 나라를 위한 대의적 결의였다?


전쟁이 났을 때, 상식적으로 최고 지도자가 전선의 제일 앞줄에서 싸우다가 죽는 것, 그 것과 안전한 후방에서 지휘하는 것, 뭐가 유리할까요? 긴급하게 피난 가는 것은 상식중의 상식입니다.

 -영화 건국전쟁


이 말만 보면 분명히 맞는 부분이 있다. 당연히 후방에서 지휘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전혀 상황을 모르고 하는 소리임을 알 수 있다.


625전쟁이 1950.6.25일 새벽 4시에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하였다. 북한이 진군하는 동안 이승만은 1950년 6.27일 04시에 피난을 시작하였다. 고작 자신의 경호원 2명과 프란체스카 여사만 데리고 말이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말이다. 처음에 대구까지 갔다가 너무 멀리왔다는 경호원의 말에 다시 대전으로 가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진다.

대전을 방문 중인 이승만대통령(출처: 【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57)] 이승만의 대전피난과 거짓 방송논란...대전형무소 수천명 대학살 - 이세종경제 (e-sejong.co.kr))

상황에서 서울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서울 국회에서는 '서울사수결의대'를 개최한 , 당시 경무대에 있을 이승만을 찾아갔지만 이승만은 있지 않았다. 후의 엄청년 혼란은 안봐도 뻔할 뻔자다. 당시 서울사수를 주장하는 많은 의원들, 그리고 이에 반대하고 부산으로 피난갔던 의원들 사분오열하여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많은 의원들과 정치인들이 과정에서 납북되었다.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등 만약 납북되지 않고 있었다면 한국의 엄청난 인재가 되었을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들은 이런 혼란 속에서 북한에 체포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도 전쟁 굉장히 혼란스러워 했던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 상황에서 라디오 방송이 울려 퍼졌다. 서울을 사수하라는 소리였다.


이 방송에 의해서 당시 서울의 100만에 가까운 국민들은 피난을 가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이를 신뢰하지 않고, 폭격소리가 무서워 피난을 갔던 약 25만명의 도강자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 보다 훨씬 더 많은 120만명의 잔류파 국민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것은 전적으로 행정공백을 야기했던 행정 수장 이승만의 책임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의 책임인 것인가?


심지어 당시 미국 대사였던 무초 역시 이승만의 피난 소식을 신익희를 통해서 들었다.


무초 초대 주한대사

즉 이승만은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피난 소식도 알리지 않았고, 국무위원, 국회의원등 어떠한 정치인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미국 대사에게까지 알리지 않아서 행정공백상태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런승만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도피자란 것인가.


그리고 다시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 도망가지 않았던 120만명의 잔류파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수사하여 그 중 5만명을 끌고 가서 조사를 하게 되는데, 이 것이 진짜 무책임한 정치인의 전형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정치인이 나쁜 정치인이라 말인가. 당시 대한민국 개전 당시 행정 공백상태, 거의 무정부상태로 만들었고 부실한 상태로 북한군에 맞서게 했던 상황을 만든 것이 이승만이다. 그리고 이 것은 이승만의 지나친 반공 정책과 이로인한 그의 지지상실, 행정력 약화로 인해  체계적인 전쟁 대응 약화로 이어졌다 사실은 조금만 공부해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고, 이미 역사학계에서 결론이 다 난 사실이다.

 영화에서처럼 결과가 전쟁을 잘 막아냈다고 그 과정에서 좋은 행적을 보인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역사학도라할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이번 아시안컵에서 결론만 보면 4강에 간 클리스만은 정말로 억울할 것이다. 벤투호 때는 8강에 갔는데, 왜 난 4강에 가도 뭐라하느냐는 그의 불평불만은 정말로 합리성을 얻게 될 것이다.

결과만 놓고본다면 아시아컵을 4강이나 올려놓은 클리스만은 정말 위대한 감독이 된다. 클리스만이 천하의 졸장인 것은 그 과정에서 보였던 감독으로서의 최악의 태도 때문이다.




3. 마무리하며

출처: 네이버 이미지

흔히 학계에서는 이승만을 양파 껍질에 비유를 많이 한다. 까도까도 단점만, 과오만 나오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다. 그의 행적을 보면 독립운동가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굉장히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이며 그의 말이나 행적을보면 왕조적 사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 많다. 그런 그에게 국부라는 칭호를 내리고, 그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던 날을 건국절이라 임명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건립하는데 공을 세운 수 많은 임시정부 관계자 및 독립운동가, 그리고 정치인, 국민들의 노고를 무시하는 것일 것이다. 이승만의 행위를 계속 추앙하는 것은 반헌법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315부정선거의 주범인 그의 행동에 반하여 일어난 419혁명을 폄훼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아래의 헌법 내용에 전면으로 부합하기도 하고 말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1987년 10월 29일 -출처: 대한민국 헌법


모든 인물들에게는 공과 과가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또한 그렇다. 이승만의 행적에 대해서 굳이 추앙하고 싶다면 그가 정말 잘 했던 '이승만 라인'이나 '한미방위조약'을 언급하면 된다. 하지만 과에 대해서도 우리는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


오늘날 뉴라이트라는 친일 매국사관에 입각한 역사가 등장하였고, 이 사관에 입각한 특정 정당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서 특정 인물을 더욱더 대단하게 만드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그 가운데 바로 이승만이 존재한다. 이렇게 역사에 정치가 개입되게 되면, 우리는 올바른 역사가 아닌 왜곡된 역사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왜곡된 기억을 갖게 되는 나라들이 성하는 경우를 잘 보지 못하였다(EXCEPT JAPAN) 병자호란의 치욕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던 조선은 그 군사력 그대로 가지고 제국주의에 의해서 휘둘리며 멸망하였다. 청나라 또한 자신들의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고 과거의 중화주의에 입각하며 살아가다가 결국 멸망하였다.

반성없는 일본의 모습으로 지난 30여년간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겪고 있었다. 독고다이 자세로 일관한 외교술로 국제적 고립이 이 원인이라 생각한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일본 또한 동아시아 패권이란 영역에 머물다가 미국에 의해서 패전하였고, 전 후에도 반성없는 역사로 일관하며 살아가다 외교적으로 고립을 맞이하게 되어 20~30년동안 잃어버린 일본이란 경제위기가 지속되었다. 반면 역사를 직시한 미국은 (진주만 사건 때 폭격된 선함을 여전히 전시하고 있다) 현재 세계 제 1위의 국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또 과거사를 통렬히 반성하는 독일도 패전국의 불명예에서 벗어나 통일을 이루고 유럽 최강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출처: 뉴시스 애리조나함(애리조나함은 진주만 공습 때 파괴되었다. 미국은 이 잔해를 기념관으로 세워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올바른 역사적 사관을 갖는 것이 올바른 국가경쟁력을 가지는 핵심이다. 반성없는 과거는 반복되며 그 반복을 또 과거의 못난 역사로 도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네이버 지도


작가의 이전글 민주화: 한국 경제 성장의 동력 NO.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