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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그날의 식탁에서》

진짜 나를 찾아가다.

by 감성소년

1장. 말하지 않아도 알 줄 알았어



새벽 다섯 시.
방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핸드폰 화면만이 얼굴을 어둡게 비추고 있었다.
안나는 알람을 끄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또 이런 하루가 시작됐구나.’

유년기 내내, 안나는 말이 없었다.
말을 하면 틀릴까 봐, 웃으면 이상하단 소리를 들을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지냈다.
그러면 아버지는 “얘는 참 얌전해서 좋다”고 했다.
어머니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초등학교 3학년.
반 친구들이 ‘여장놀이’라고 치마를 입혀준 날,
안나는 처음으로 거울을 오래 바라봤다.
거기엔 분명 자신이 있었지만,
처음으로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그런데 그걸 들킨 날, 아버지는 가죽 벨트를 꺼냈다.

“남자가 그게 뭐하는 짓이야?”
“아버지, 전 그냥…”
“그냥은 다 필요없어! 정신 차려!”

그날 이후로 안나는 거울도, 웃음도, 벽장 안의 치마도 멀리했다.
아버지에게 혼나는 것보다,
어머니의 “엄마가 널 믿은 게 잘못이었네”라는 말이 더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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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입대 전날 밤,
안나는 누워서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자해 충동은 그 시기부터 찾아왔다.
차라리 입대해서 ‘남자다운 무언가’를 배우면
이 괴상한 감정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군대는 지옥이었다.
자기 안의 정체성을 외면할수록,
더욱 비참해졌고,
훈련소 첫날부터 가슴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밤마다 이어지는 악몽과 식욕 부진.
심리 상담 때 털어놓았지만, 돌아온 말은 이랬다.
“다들 그런 거야. 여기선 감정 같은 거 접어두는 게 좋아.”

안나는 꾹 참고 전역했다.
그리고 25살.
진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의사 앞에서
안나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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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씨, 잘 오셨어요.”

그 한마디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기다려왔던 건 어떤 설명이나 진단이 아니라
그저, ‘이름’이었다.
아무도 몰랐던 그 이름을
단 한 번도 집에서는 불러보지 못한 그 이름을
이제는 스스로 선택해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엄마, 나 나중에 얘기할 게 있어요.”
독립 후,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짧았다.
“또 돈 필요하니?”

안나는 그날 이후 연락을 끊었다.
카카오톡도, 페이스북도, 전화번호도 모두 바꿨다.
트랜지션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적어도 ‘안나’로 살아가는 동안엔 매일매일 조금씩 숨을 쉴 수 있었다.
거울 속 얼굴이 달라졌고,
목소리는 부드러워졌고,
무엇보다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아도 되는 아침’을 맞이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부모와 연락을 끊은 시간.
외로웠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상한 영상을 띄웠다.
어느 지방 방송국 다큐멘터리.
화면 속에는 익숙한 얼굴이 앉아 있었다.
“우리 애는요… 연락도 없어요.
예전엔 조용하던 아이였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모르겠어요.”

아버지였다.

순간 안나는 숨이 막혔다.
손이 떨렸다.
그 사람은 여전히 ‘나’를 ‘아들’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눈빛은 어쩐지
몹시 슬펐다.

안나는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오래도록 꺼내지 않았던 노트북을 켰다.
메일함을 열고,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썼다.

끝내 보낸 첫 문장은 이랬다.


‘엄마 밥 한 끼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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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너도 날 잃었고, 나도 널 버렸지



“네가… 그걸 진심이라고 생각하니?”
어머니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문자 하나였다.
안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름을 바꾸고, 성별정정을 신청한 그해 봄.
가까운 사촌 언니의 결혼식 사진을 SNS에 올렸다.
사진 속 안나는 베이지 톤의 정장을 입고, 가볍게 눈 화장을 했다.
미소는 분명했지만, 그 뒤로는 소식이 뚝 끊겼다.

며칠 후, 친척의 전화를 받은 어머니가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어머니는 안나의 얼굴을 째려보았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엄마, 나 지금… 나로 살고 있어.”
“그건 네가 살고 있는 게 아니야.
넌 그냥… 병든 거야.”

그날 어머니는 안나의 집에 있던 메이크업 도구들을
쓰레기봉투에 쑤셔넣었다.
안나는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았다.


애써 외면했지만, 손이 떨려 컵을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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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렇게 망가뜨리니.”
“망가진 건, 지금이 아니라 그때였어…
내가 나를 죽이던 그때.”

문이 닫히고, 집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안나는 엎어진 컵을 치우지 않았다.
대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낯설고도 익숙한,
‘안나’가 아닌 ‘그 애’가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동안, 안나는 그 모습이 싫었다.
그것은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름’을
또다시 덮어쓴 얼굴이었으니까.

그날 이후, 안나는 완전히 사라졌다.
전화번호도, 이메일도, 이름도 지웠다.
한때는 가족이었지만,
지금은 서로 없는 사람처럼 살아갔다.

시간이 흘러, 거리에서 비슷한 연배의 여성을 보면
안나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아마, 어머니가 저런 옷을 입었을까.
저런 미소를 지었을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늘 무심하고 무뚝뚝한 사람이었으니 놀랍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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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끔은
“밥은 먹고 다니냐”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작 가족이 없어진 뒤에야,
안나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그리운 말이란 걸 알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유튜브 알고리즘이 그를 불러냈다.
흐릿한 화질 속, 수척한 얼굴이 화면에 나왔다.

“우리 애가요… 연락이 없어요.
어릴 때는 참 조용하고 순한 아이였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는지,
말도 없이 가버렸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버지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눈망울도 젖어 있었다.

그 화면을 보던 안나는
손에 쥔 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번엔 일부러였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가슴 속 울음 같은 무언가가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만이 있었던 게 아니야.
살아 있으려고, 나로 살아보려고…
그게 그렇게 미안한 일이었을까…”

그날 밤,
안나는 오래 묵혀뒀던 노트북을 열었다.
세 번 지우고, 다섯 번 다시 썼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썼다.

“엄마, 밥 한 끼 어때요.”

답장은 일주일 후, 도착했다.
짧고도 묘한 말이었다.

“밥이나 먹자. 네 말이 맞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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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밥이라도 먹자




토요일 오후 두 시.
안나는 검은색 바지를 입고, 베이지색 니트를 꺼내 입었다.
적당히 정돈된 머리카락과 연한 화장.
립스틱은 바르지 않았다.
입술을 보이면, 말이 튀어나올까 두려웠다.

예약한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손은 이미 차가웠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휴대폰에 떴다.
“엄마: 다 왔다.”

안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긴 머리를 묶지도 않은 채,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여인은, 너무나도 낯익고도 낯설었다.

어머니는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너 이게 뭐니.”

첫마디.
그토록 무서웠던 말.
안나는 숨을 들이켰다.

두 사람은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물컵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어머니는 안나를 똑바로 보지 않았다.
계속 메뉴판만 들여다보았다.
안나는 입을 열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내가 안 나오면 또 무슨 소리 들을지 모르겠더라.”

“저, 지금은… 이름이 있어요.”
“너, 아직 그 얘기 하려고 부른 거야?”

“엄마, 전 그냥—”
“넌 그냥, 병이야.
이건 네 고집이 만든 병이야.”

그 말에 안나는 조용히 손을 모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엄마, 저 죽으려고 했었어요.


군대 다녀오고, 매일 칼을 쥐었어요.
왜냐면, 내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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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입술은 앙다물린 채,
물컵을 집어 들었다.

“죽지는 않았잖아.
지금 이렇게 멀쩡히, 잘 살잖아.”
“아뇨.
지금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건…
제가 드디어 안나가 됐기 때문이에요.”

그 순간, 어머니는
처음으로 안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은 어릴 적 울던 자신을 품어주던
그때의 눈이 아니었다.
조금 더… 초라하고, 조금 더…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다고 네가 내 딸이 되는 건 아냐.”
“…그 말, 이제 안 무서워요.
엄마가 날 몰라도,
나는 나를 알아요.”

잠시 정적.
그때, 어머니가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두 손은 떨리고 있었다.

“니 얼굴이… 너무 아프더라.
TV에서 니 아빠 나오는데,
그 얼굴이…
그 눈빛이…
니가 어릴 때 울던 눈빛이더라.”

식사가 나왔다.
어머니는 국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고,
고개를 숙였다.
안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날의 식사는,
울음과 밥 사이의 거리만큼 느렸다.
하지만 분명히,
그 둘 사이엔 무언가 처음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생기고 있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어머니는 가방을 메며 말했다.

“다음 주에 아빠도,
너 한번 보자 그러더라.
내가 뭐라 했는진 알지?”

안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밥은 먹어보자.”

문 밖으로 나오는 길,
어머니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안나.”
안나는 움찔했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밥 잘 챙겨 먹고 다녀.”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휙 돌리고 먼저 걸어갔다.

안나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이름들이 다 귀하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안나'라는 이름이 가족에게 닿은 날,
바로 그날이었다.



4장. 아버지라는 벽



그날은 흐린 날이었다.
햇살도, 바람도 없이
그저 잿빛인 하루.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내일, 아빠도 같이 나가자고 한다. 괜찮겠니?”
안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짧게 대답을 보냈다.
“응.”

다음 날.
작은 순댓국집.
어릴 적 가족끼리 자주 갔던 단골 식당.
포슬포슬한 김이 피어오르고,
시큼한 깍두기 냄새가 공기 사이로 퍼졌다.

아버지는 이미 와 있었다.


먼저 앉아, 손을 깍지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안나가 다가가자 고개만 슬쩍 들었지만,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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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이 집 아직도 하네, 그치?”
아무도 웃지 않았다.

세 사람은 말없이 앉아 순댓국을 먹었다.
아버지는 고기만 골라 입에 넣고,
김치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안나는 밥을 숟가락으로 으깨며 말했다.

“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그럭저럭.”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많이 보고 싶었으면, 왜 그랬냐.”
“뭘요.”
“니가 그렇게까지 바뀌어야 했냐고.”

정적.
숟가락이 멈췄다.
어머니가 재빨리 물을 마시는 척했다.

안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라도 안 했으면, 아마 지금 여기 없었을 거예요.”
“그게 사는 거냐. 남자가, 그렇게 살아서 뭐가 되냐.”
“그럼 남자답게 살아야 살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그냥, 이해가 안 간다.”

아버지는 손을 턱 밑에 올리고,
시선을 회피한 채 말했다.


“우리 땐 그런 거 없었다.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였어.
그게 당연한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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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이, 늘 옳은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가족은, 그런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야.”

안나는 잠시 침묵하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아버진 저를 잃는 게 더 쉬웠어요?”

그 질문에
아버지의 젓가락이 허공에 멈췄다.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국물만 뜨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머니가 안나의 무릎 밑을 다독이며 말했다.

“넌… 지금 잘 살고 있는 거 맞지?”
“네.”
“…힘든 건 없고?”
“많이요. 그래도 전, 안나로 살고 있어서 괜찮아요.”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말없는 사람 특유의 침묵 속엔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흔들림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셋은 밖으로 나왔다.
잔뜩 흐린 하늘.
아무 말도 없이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돌아봤다.

“이름… 불러줄 수 있으세요?”
아버지는 한참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아마, 그의 오랜 고집에
못을 박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낮고 거칠게 말했다.
“…안나.”

그리고는 어색하게 어깨를 툭 건드리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래도… 배는 든든하게 채우고 다녀.”

안나는 돌아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한때는 무서웠고,
한때는 지우고 싶었고,
한때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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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사람은,
이제 자신의 이름을 입에 올려준 첫 번째 남자가 되었다.

5장. 국밥집의 봄


그날도 역시 흐렸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잿빛이 아니라,
비가 올 듯 말 듯한 부드러운 회색이었다.

안나는 오랜만에 립스틱을 발랐다.
은은한 살구빛.
입꼬리를 조용히 올려주는 색.
작은 거울 속 자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은… 따뜻해지자.”

약속 장소는 익숙한 국밥집이었다.
어릴 때 가족들과 오면
늘 맨 끝자리 창가에 앉았다.
그날도 그 자리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먼저 와 있었다.

“왔냐.”
아버지는 눈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조금은 덜 딱딱한 목소리였다.

“여기 순대 빼달라고 했으니까, 안심해라.”
어머니가 반쯤 웃으며 말했다.
“니가 순대 싫어했잖아. 어릴 때부터.”

“…기억하시네요.”
“그걸 잊을 수가 있냐.


니가 그거 먹고는 꼭 울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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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는 웃었다.
진짜로.

밥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양은 그릇에 담긴 국밥은
마치 아주 오래된 위로 같았다.

한참 말없이 국물을 먹다,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요즘 뭐 하냐.”
“직장 다녀요. 오전엔 일하고,
저녁엔 봉사활동도 하고요.”
“…봉사?”
“네. 나 같은 사람들 도와주는 곳에서요.”
“…힘들지 않냐.”
“힘들지만, 좋아요.”

조용히 국물이 식어가는 동안,
대화는 처음으로 끊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고개를 들고 안나를 바라봤다.
오래된, 하지만 진심 어린 눈빛이었다.

“니가 그때 말했잖냐.
그렇게라도 안 했으면 죽었을 거라고.”
“…네.”
“그 말이… 며칠 내내 머릿속에 맴돌더라.
그날 내가 너 보낸 건지… 너 혼자 간 건지…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잠도 안 오더라.”

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숟가락을 내려놓고,
조용히 손을 포개었다.

아버지는 허공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니가 어릴 때
눈물 참으려고 입술 꼭 깨물던 거 아직도 기억난다.
그게 뭐가 이상해서,
뭐가 불편해서,
나는 그걸 미리 안아주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식당 안엔 조용한 트로트가 흘렀다.
사람들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한 테이블 위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흐르지 않는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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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너, 참 잘 컸다.”
“엄마도요.
많이 변하셨네요.”
“…니가 다르게 살기로 한 순간부터
나도 생각이 달라졌지.”

밥을 다 먹고,
계산을 하려고 하자
아버지가 말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은 아빠가 샀다.
다음엔 니가 사라.”
“다음에 또 와요?”
“그래야지.”
아버지는 돌아서며 툭 한 마디를 남겼다.

“우리 딸한텐 국밥이 잘 어울려.”

국밥집을 나오는 길.
바람이 살짝 불었고,
회색 하늘 사이로
햇살 한 줄기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안나는 그 햇살 아래서
처음으로
가족이 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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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안나는, 안나로 살기로 했다

지하철 창밖으로 봄이 흘렀다.
분홍빛 꽃잎이 가로수 위로 떠 있고,
유모차를 미는 젊은 엄마가 지나가고,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웃으며 달려갔다.

안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그 공기 속엔 아직도 세상의 편견이 섞여 있었지만,
이젠 더 이상 그것에 짓눌리지 않았다.

지갑 안에는
이름이 새겨진 주민등록증이 들어 있었다.
“안나.”
다섯 글자의 성과 세 글자의 이름.
그건 단지 법적인 정체성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견뎌낸 시간의 증명이었다.

며칠 전,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나야, 이번 주말에 아빠 생일인데… 같이 밥 먹자.”


그 말이 너무 당연하게 들려서,
잠깐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조용히 웃었다.

“알았어요. 순대 빼달라고 꼭 말씀드려요.”

전화를 끊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눈을 피하지 않는
한 여자가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어?’
‘정말 그게 네 진짜 모습이야?’
‘가족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

그런 질문들.
그 잔인한 말들.
그 무심한 시선들.
안나는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래도, 나는 살아 있어요.
이름 없는 채로 사는 것보다,
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내가 되고 싶었어요.”

모든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
모든 부모가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당신은 당신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
그 사람이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그건 살아갈 이유가 되었다.

안나는 알았다.
자신이 울며 지워낸 과거가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용기가 된다는 걸.

그리고 조용히 속으로 말했다.

“나는 이제, 안나로 살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레스토랑 테이블 너머,
국밥집의 스팀 속,
햇살 번지는 벤치 위에서
안나는 한 발, 또 한 발,
자신의 삶 위를 걸어간다.

더는 도망가지 않는다.
더는 숨지 않는다.

그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름을 받아줄 사람들이 생겼으니까.

마지막 문장.
그건 독자에게 닿는 안나의 목소리다.

“당신은, 당신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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