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 1등 당첨. 무려 72억.
그날 아침, 철수는 찜질방 TV 화면에 떠오른 이 문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에 물고 있던 우유를 바지에 흘렸다. 당첨된 지역은 다름 아닌 ‘경기 의정부’. 철수가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야... 이 동네서도 이런 게 터지긴 터지네.”
철수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마침 오늘은 이틀 굶은 날이었다. 누군가는 인생이 바뀌었겠지만, 철수에게는 감자깡 하나 없는 날이었다.
철수(38)는 백수였다. 자칭 '소시민 철학자'. 철학과를 나와 졸업식장에서 교수에게 "이제 뭘 하면 됩니까?"라고 물었던 남자다. 이후로 인생을 질문으로 시작했고, 여전히 질문 중이었다. 일은 안 했고, 글은 안 됐고, 밥은 가끔 먹었다.
그의 옆자리에는 박종배(45)가 누워 있었다. 반쯤 헝클어진 머리, 늘어진 런닝셔츠. 이혼 3년 차. 전처는 집에 있던 고양이까지 챙겨 떠났고, 종배는 집 대신 찜질방 월 정기권을 끊었다. 그게 그의 유일한 부동산이었다.
그리고 신문을 배에 올리고 자던 노인, 이만수(67)가 코를 골며 일어났다. 무릎엔 파스, 손엔 복권. 은퇴 후엔 시 낭송 모임을 다녔지만, 요즘은 오직 ‘한 방’에 인생을 건 노년이었다. 복권이 그의 기도요, 유일한 기대였다.
셋은 어제 저녁, 같은 시각에 찜질방 안 복권 자판기 앞에 섰다. 말은 안 했지만, 같은 희망을 품고 복권을 뽑았고, 같이 스크래치를 긁었다.
철수가 먼저 소리쳤다. "오잉? 나 이거… 5등 당첨인데요? 만 원!"
종배도 확인하더니, "나도 만 원! 야, 이거 신기하네."
만수는 멋쩍게 웃으며, "나도. 세 명 다 5등? 이건 뭐, 우연치곤 좀 그렇지 않소."
그들은 즉석에서 그 돈으로 편의점에서 막걸리 두 병과 김치전을 사서 테이블에 앉았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금세 풀어졌다. 철수는 자기 철학 개론을, 종배는 이혼 무용담을, 만수는 인생의 기적을 믿는다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뉴스에서 복권 1등 번호가 발표됐다. 당첨 지역은 경기 의정부. 그들의 찜질방 근처였다.
셋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공용 테이블로 향했다. 만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제 복권 긁고 남은 거 하나, 가방에서 나왔는데 말이지. 그게... 번호가 이상하게 비슷하단 말이야.”
찜질방 테이블 위에 놓인 복권 용지. 셋은 숨을 죽인 채 그것을 내려다봤다. 어제 마시고 퍼질러 잤던 막걸리 기운이 가시기도 전이었다.
만수가 조심스레 말했다.
“원래 긁으려고 했는데, 막걸리 먹고는 까먹었지 뭐야. 오늘 아침에 가방 정리하다가 나왔어.”
그가 꺼낸 복권은 구겨져 있었고, 잉크가 살짝 번져 있었다. 철수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기다려봐요. 어제 발표된 번호가... 5, 11, 23, 31, 42, 45. 보너스는 13.”
종배가 숨을 삼켰다. 철수의 손가락이 복권의 숫자를 하나하나 짚어나가고 있었다.
“...이거, 진짜예요.”
“뭐가 진짜라는 건데?” 종배가 눈을 찌푸렸다.
“번호 전부 다 맞아요. 보너스까지.”
셋은 서로를 바라봤다. 만수의 입이 먼저 벌어졌다.
“…이게 진짜… 1등이라는 거야?”
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률로 따지면 거의 기적이에요.”
종배가 중얼였다. “이게 진짜면… 72억이야.”
그들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입술이 말라갔고, 숨결은 더워졌다. 그 어떤 찜질방의 온도보다 그들의 뇌 속이 뜨거웠다.
그러다 만수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근데 말이지… 이건 내가 산 복권이 아니야.”
“…네?” 철수와 종배가 동시에 되물었다.
“어제 탈의실 근처에서 누가 흘린 거 같아서… 아무도 없길래 주웠어. 번호도 안 긁혀 있어서 그냥 주머니에 넣었지.”
정적. 셋은 복권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광 같던 그것이, 갑자기 불발탄처럼 느껴졌다.
종배가 머리를 긁적였다.
“야… 이거 그냥 갖고 가도 되는 거야? 법적으로 애매하잖아.”
철수가 말했다.
“주인 불명이고, 24시간도 넘었고... 뭐, 습득물 신고는 할 수는 있지만... 솔직히 그게 진짜 주인한테 가긴 어려워요.”
“게다가 우리가 이걸 가졌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만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종배는 복권을 손에 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그냥... 우리 셋이 이걸 갖고 복권 본사로 가자. 솔직하게 말하고, 그쪽에서 결정하게 하자.”
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우린 도망치는 사람도 아니고, 거짓말도 안 할 거니까.”
셋은 마치 중요한 계약서를 한 장씩 나눠 가진 사람들처럼, 복권을 조심스럽게 봉투에 넣었다.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묘한 하루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복권 본사까지는 세 정거장, 그러나 그 길은 인생 전체를 흔드는 여정이었다.
첫 정거장, 버스 정류장 앞.
철수는 잠깐 멈춰 섰다.
“우리, 진짜 이거 하러 가는 거 맞아요?”
종배는 복권 봉투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이미 마음은 출발했어.”
만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긴 해.”
그들은 조심스레 버스에 올랐다.
의정부 시내의 햇살은 따뜻했지만, 셋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얼룩져 있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 틈에 섞인 세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을 깨트린 건, 버스 뒤쪽에 앉은 한 아이의 말이었다.
“아빠, 우리 복권 사면 진짜 부자 되는 거야?”
아빠가 대답했다. “글쎄, 세상엔 공짜가 없단다.”
그 말에 철수가 피식 웃었다. 종배와 눈이 마주쳤고, 둘은 동시에 창밖을 바라봤다.
두 번째 정거장.
내리는 사람 없이, 그들만 남았다.
그때 철수가 말했다.
“솔직히... 우리, 이거 가져가면 어차피 못 받는 거 알죠?”
종배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가야지. 안 가면 평생 그날 생각날 거야.”
만수는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후회는 늘, 안 한 쪽이 남는 법이지.”
그러자 종배가 덧붙였다.
“이게 그냥 돈 때문은 아닐 거야. 우리 각자, 뭔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던 거지.”
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적어도 저는 오늘, 살아있는 기분이에요.”
셋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복권이 아니었으면, 아마 오늘도 서로의 이름조차 몰랐을 것이다.
버스는 마지막 정거장을 향해 달렸다.
세 번째 정거장. 복권 본사 앞.
그들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앞에 다다르자, 철수가 멈춰 섰다.
“마지막으로 묻죠. 진짜 이거, 들어갑니까?”
종배는 짧게 말했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
만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손에는 여전히 봉투가 있었다.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그날 하루를 바꾸고 있었다.
복권 본사 건물 안. 세 사람은 안내 데스크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의 손엔 아직도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직원은 침착하게 말했다.
“확인 절차를 위해 복권 원본을 잠시 맡겠습니다.”
철수가 떨리는 손으로 복권을 내밀었다. 직원이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고, 셋은 로비에 남았다.
“진짜, 진짜라면...” 종배가 말을 흐렸다.
만수는 고개를 숙였다.
“이게 꿈이면 깨지 말았으면 좋겠어.”
10분이 지나고, 직원이 돌아왔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확인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조심스럽게 복권을 봉투에 다시 넣었다.
“해당 복권은 1등 번호와 일치하긴 하나...”
셋이 숨을 삼켰다.
“...훼손으로 인해 유효성 검증이 불가능합니다. 특히 오른쪽 하단의 바코드 부분이 번져 있어 정식 인정이 어렵습니다.”
“뭐, 뭐라고요?” 종배가 물었다.
“복권은 번호만이 아니라, 바코드도 일치하고 판별 가능한 상태여야 유효합니다. 현재 상태로는 확인이 어렵고, 지급은 불가합니다.”
철수는 황급히 복권을 들여다봤다.
모서리는 구겨졌고, 숫자 아래 바코드 부분은 커피 얼룩인지, 물인지 번져 있었다.
“...누가 주운 거라고 했잖아. 길바닥에서.”
만수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셋은 무언가 깨달은 듯 서로를 바라봤다.
무릎이 풀린 종배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럼 우리, 그냥 속은 거예요?”
그들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아무 말 없이 천장만 바라봤다.
종배가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그냥 속은 거예요?”
철수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운 복권에 인생 걸면 안 되는 거였나 봐요.”
만수는 봉투를 천천히 접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울지 않았다.
“그래도...” 만수가 입을 열었다. “오늘, 재밌었소.”
종배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 양반, 정말... 이런 날에도 좋대.”
철수도 피식 웃었다. “그래요. 오늘, 적어도...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하루였어요.”
그렇게 셋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각자의 방향으로.
종배는 찜질방 월 정기권을 해지했다. 그리고 중고 자전거 한 대를 샀다. 새벽마다 우유 배달을 시작했다. “사람은 뭐라도 해야 정신이 덜 돌아버리니까요.”
철수는 도서관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소시민 철학자로서 글을 쓰는 삶이 비루할지라도, 적어도 말은 남기고 싶었다.
만수는 시 낭송 모임에 돌아갔다. 복권 대신, 손에는 노트를 들었다. 그리고 첫날 낭송한 시는 ‘기회’였다.
그들의 위대한 하루는 실패했지만,그들의 위대한 여정은 그날 이후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