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기억을 굽는 편의점

by 감성소년

제1장: 흙먼지 속의 그리움

평택의 공사 현장은 거대한 괴물의 내장 같았다. 사방에 널린 철근과 콘크리트 더미, 그리고 밤낮없이 울려 퍼지는 기계음은 인간의 감각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오늘도 끝났네."

진수는 안전모를 벗으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작업복 바지에는 오늘 하루의 고단함이 훈장처럼 진흙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동료들은 벌써 소주 한 잔을 걸치러 떠났지만, 진수는 혼자 걷는 이 새벽길이 좋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 길 끝에 있는 기묘한 편의점 '상실'에 가기 위해서였다.

편의점 문을 열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 대신 눅눅하고도 포근한 시골집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카운터 뒤에는 소설가이자 주인인 민희가 낡은 만년필을 굴리며 앉아 있었다.

"어머, 진수 씨. 오늘도 고생 많았네요. 어깨가 어제보다 더 내려앉았어."

민희의 목소리는 서늘하면서도 다정했다. 진수는 대답 대신 카운터 앞에 놓인 낡은 나무 의자에 몸을 맡겼다.

"민희 씨, 오늘은... 정말 못 견디겠더라고요. 현장에서 자재를 나르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싶고. 그러다 문득 그 냄새가 났어요. 비 오는 날, 우리 엄마가 부쳐주던 굴파전 냄새."

민희는 쓰던 노트를 덮고 눈을 빛냈다.

"굴파전이라... 그거 참 어려운 요리인데. 그냥 파전이 아니라 '어머니의 굴파전'이라면 재료가 좀 특별해야겠네요."



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편의점 가장 깊숙한 곳,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기억 저장고'로 향했다. 그곳에는 수천 개의 유리병이 저마다의 빛을 내며 진열되어 있었다. 민희는 조심스럽게 파란빛이 감도는 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라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95년, 시장통의 활기와 어린 아들의 웃음소리]

"자, 시작해 볼까요? 진수 씨. 기억하시죠? 이 맛을 재현하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에서 그 기억의 장면은 지워집니다. 하지만 그 맛이 주는 에너지는 당신의 지친 무릎과 어깨에 박혀, 내일 아침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거예요."

진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머니의 얼굴을 잊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지만, 지금 당장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이 마음을 채우지 못하면 내일의 태양을 볼 자신이 없었다.

"네, 해주세요. 제발."

민희는 무쇠솥을 달구기 시작했다. 치익—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연기 속에서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 진수가 비를 쫄딱 맞고 들어오자, 행주를 어깨에 멘 어머니가 등을 찰싹 때리며 "이 녀석아!" 하고 꾸짖던 그날의 풍경이.


제2장: 타오르는 무쇠솥, 그리고 잊혀가는 얼굴

민희는 아무 말 없이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투명한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에는 소금물에 절여진 굴이 아니라,옅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어떤 눈물'이 담겨 있었다.

"이건 작년에 왔던 어느 실향민 노신사가 두고 간 '고향의 바다 안개'예요.진수 씨 어머니가 쓰시던 그 서해안 굴 맛을 내려면 이 베이스가 꼭 필요하거든요."

민희가 병을 따자 편의점 내부로 비릿하면서도 시원한 바닷바람이 휘몰아쳤다.진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분명 편의점 자동문은 닫혀 있는데,발목 언저리에 닿는 공기가 축축해졌다.

치익—!

달궈진 무쇠솥 위에 반죽이 닿는 소리는 마치 비가 쏟아지는 소리 같았다.민희의 손놀림은 정교했다.쪽파를 가지런히 깔고,그 위에 은빛 굴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올렸다.노란 계란물이 그 위를 덮을 때마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과거의 잔상들을 불러냈다.



"자,이제 가장 중요한 재료를 넣을 시간이에요."

민희가 진수의 이마에 손을 살짝 얹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닿는 순간,진수의 머릿속에서 필름 하나가 강제로 인화되듯 튀어나왔다.

'진수야,뜨거울 때 무라.니는 이래 묵어야 기운 차린다.'

열 살의 진수.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가 장날에 겨우 사 온 굴 한 봉지로 부쳐내던 그 파전.기름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하던 그 눅눅한 단칸방의 공기.진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환영 속의 어머니를 잡으려 했다.하지만 민희는 차갑게 그 환영을 낚아채 무쇠솥 안으로 던져 넣었다.

"안 돼...!"



진수가 비명을 지르듯 중얼거렸지만,솥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이미 그 기억을 삼키고 있었다.어머니의 목소리가,그 따뜻한 눈빛이 지글거리는 기름 소리에 섞여 들어갔다.그리고 신기하게도,불길이 거세질수록 진수의 굽어있던 어깨가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다 됐어요.기억과 맞바꾼 에너지,'망각의 굴파전'입니다."

민희가 내어놓은 파전은 눈부시게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파전을 보며 진수는 젓가락을 들었다.손이 덜덜 떨렸다.한 입 베어 무는 순간,입안 가득 고소함과 바다의 풍미,그리고 알 수 없는 뭉클함이 터져 나왔다.

"맛있어...정말 맛있는데..."

눈물이 파전 위로 툭 떨어졌다.씹으면 씹을수록 몸 안의 세포들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현장에서 삐끗했던 허리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고,내일 또 그 먼지 구덩이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공포가 신기하게도 무덤덤해졌다.



그런데 이상했다.파전을 절반쯤 비웠을 때,진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민희 씨...근데 아까 제가 누구 얘기를 했었죠?제가 왜 굴파전을 먹고 싶어 했는지...기억이 안 나요."

민희는 그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남은 파전을 가리켰다.

"괜찮아요,진수 씨.머리는 잊어도 당신의 근육은 기억할 거예요.당신이 오늘 밤 이 파전을 먹기 위해 지불한 그 사랑의 크기만큼,당신의 다리는 내일 더 단단하게 땅을 지탱할 테니까요."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진수의 머릿속에서 '어머니'라는 단어의 색깔이 완전히 휘발되어 사라졌다.그저 아주 먼 옛날,누군가 자신을 지독하게 사랑해 주었다는 막연한 온기만이 심장 언저리에 남았을 뿐이다.



제3장(최종장): 이름 없는 사랑이 나를 일으킬 때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자, 새벽 4시의 평택 공기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폐부를 찔렀다. 하지만 진수는 평소처럼 몸을 움츠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가슴을 짓누르던 형체 없는 슬픔과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천천히 현장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은 텅 빈 백지처럼 깨끗했다. 방금 먹은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그저 입안에 남은 고소한 기름기와 기분 좋은 포만감만이 그가 방금 '기적'을 맛보았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어이, 이진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다음 날 아침, 현장 반장이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진수는 대답 대신 씩 웃으며 안전모를 고쳐 썼다. 평소라면 천근만근이었을 팔다리가 가벼웠다.

"반장님, 오늘 저쪽 105동 자재 정리 제가 하겠습니다."

"뭐? 거긴 젊은 애들도 힘들어서 도망가는 데 아냐? 너 오늘 컨디션이 왜 이래?"

진수는 스스로도 의아했다. 그런데 자재 더미 앞에 서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묵직한 철근을 들어 올릴 때, 어깨 근육이 비명 대신 기분 좋은 탄성을 내질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뒤에서 등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누구였을까.'



진수는 잠시 멈춰 섰다. 나를 이토록 단단하게 지탱해 주던 그 따뜻한 힘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기억의 서랍은 비어 있었다.

그때였다. 현장 가림막 너머로 이름 모를 들꽃 한 송이가 피어 있는 것이 보였다. 비바람에 꺾일 듯하면서도 꿋꿋하게 고개를 든 그 꽃을 보는데, 갑자기 심장 한구석이 찡하게 울렸다.

"아..."

그는 깨달았다. 민희가 말했던 '망각의 대가'가 무엇인지. 비록 그 맛을 가르쳐준 얼굴도, 비 오는 날의 다정한 목소리도 이제는 떠오르지 않지만, 그 사람이 자신에게 부어주었던 '사랑'만은 사라지지 않고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이 단단한 근육 속에 살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점심시간, 식당 구석에서 동료들이 굴파전이 담긴 식판을 들고 투덜거렸다."에이, 이거 맛이 왜 이래? 역시 파전은 우리 엄마가 해주는 게 최고인데."

진수는 그 말을 듣고 멍하니 자기 식판을 내려다보았다. '엄마'라는 단어가 낯설게 다가왔지만, 왠지 모를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파전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어젯밤 편의점에서 느꼈던 그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정성스럽게 씹어 삼켰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왜 이 거친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지, 왜 다시 살아가야 하는지 그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내 몸 안 어딘가에 나를 위해 일생을 바쳐 기도했던 누군가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는 확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진수는 다시 장갑을 끼고 일어섰다. 멀리서 지는 노을이 평택의 거대한 타워크레인 사이로 붉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상실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가장 뜨거운 양념이라는 것을.

편의점 '상실'의 창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희는 조용히 만년필을 들고 일기장의 마지막 장을 채웠다.

[기억은 사라져도, 사랑은 힘이 되어 남는다. 오늘 또 한 사람이 내일을 얻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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