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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저 Jun 28. 2023

제3장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들은 그녀의 기대와 다르게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보는 나날들은 줄어들었지만, 서로를 위하고 응원하는 마음은 헤아릴 수도 없이 깊어져만 갔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잘 살아내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과 기대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만큼 아주 어릴 때부터 내면이 단단한 아이들은 세상 어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스물일곱의 어느 여름날, 신논현역의 작은 바에서 그녀는 오랜만에 동아리 친구들을 만났다. 19살 때부터 그녀와 함께 해 왔고, 남자들로 가득 찬 삭막한 이공계열에서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소수의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다른 동아리 선후배들보다 조금은 더 깊은 우애와 몇 번의 충동적인 호캉스와 해외여행을 함께 하며, 그녀들은 나름의 계모임처럼 매달 첫 번째 토요일마다 만났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그녀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답이 나오질 않는다고 한탄하며, 자신들의 길을 일찍이 깨달아 먼저 삶의 방향성을 찾은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물론 그녀의 친구들도 쉽게 방향성을 찾은 건 아니었다. 그녀의 친구 중 가장 먼저 결혼을 하게 된 친구는, 학창 시절 주목받던 연구자였다. 평생 연구를 할 것만 같던 친구는 대학원에서 방황 끝에 결국 컨설팅 회사에 들어갔다. 대학원에서의 시간은 그녀에게 “죽은 시간”이었지만, 미래에 새로운 발자국을 내딛기 위해 “없어진 시간”은 아니었다. 또 다른 친구는 4년 전에 의대에 편입해 올해 졸업할 예정이었고, 다른 친구는 유학을 가, 저 멀리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신만의 실험에 열중하고 있었다.


곧 결혼을 할 친구는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대학생활 동안 했던 모든 동아리 활동과 인턴십 경험들은 결국 나를 찾기 위해, 그리고 나의 적성을 알아보기 위한 시간들이었을 거라고. 그러니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소리 내어 말할 수는 없어도, 그 개념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어도, 너의 무의식에서는 원하는 것이 있을 거라고 했다.


미국에서 온 친구는 그녀에게 삶에 사소하고도 즐거운 일들, 또는 늘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조언했다. 너무나도 일상적이라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하면서. 그녀가 회사에 출근하기 전에 아침마다 운동을 하는 것, 퇴근 후 늘 도서관에 들려 책을 빌려오는 것, 그런 사소한 일상들에 주목해 보라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 문득 20살의 겨울이 떠올랐다. 그녀는 당시 대학교에서 고등학생들을 위한 멘토로 활동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단순히 공부를 가르쳐주는 멘토가 아니라 진로와 꿈에 대해 상담해 주는 멘토였다. 이런 멘토들은 10주간의 교육을 받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흩어져 지방 소도시의 고등학생들을 만나며 그들의 진로 찾기에 힘을 보태 주었다.


그녀는 멘토로 활동할 때, 학생들에게 설명해 줄 꿈 찾기 관련된 여러 활동들을 직접 수행해 보았다. 그중, 하나는 인생의 로드맵을 반대로 그리는 거였다. 흔히 로드맵을 그리는 10대, 20대, 30대, 40대로 이어지는 시간순이 아니라, 역행을 하는 것이다. 가장 마지막인 80대에 이루고 싶은 것을 적고, 시간을 되돌아가 그 최종적인 목표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작성하는 활동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80대에 적은 내용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아니, 그 기억만 남아있다. 그녀의 80대의 꿈은 ‘자서전을 쓰는 것’이다.


그녀의 친구들은 ‘자서전을 쓰는 것’과 그녀가 늘 독서를 하는 것, 대학교 시절에 학술저널 잡지 동아리를 한 것, 그리고 청년기자단으로 활동한 것들이 크게 연관성이 있다며 기뻐했다. 친구들은 그녀에게 또 다른 활동 중에서 좋아하던 게 있었는지 묻자, 그녀는 한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봉사를 했던 것이라고. 그녀는 대학교 시절 의료봉사 동아리에 가입되어 있었다. 단순 가입만 된 것이 아니라, 실제 임원으로도 활동을 했었다. 그녀는 의료봉사를 가는 것이 즐거웠다. 서울의 북쪽 끝에 있는 수락산까지 집에서 편도 1시간 30분을 가야 했지만, 매주 토요일을 다 쏟아부을 만큼 깊게 빠져 있었다. 학교 시험도,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도 그녀에게는 2순위였다. 매주 토요일 의료봉사는 그녀에게 절대로 뺄 수 없는 일정이었다. 그녀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래서 몸이 편찮으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드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외롭지 않도록,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손녀뻘들을 그리워하지 않도록, 열심히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노인들은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외로워 복지관을 찾는 것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재잘재잘 떠들어 대는 스무 살의 어린 학생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의 푸르른 젊음을 어떻기 보실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녀가 처음 의료봉사 동아리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선배 면접관들은 그녀에게 물었다. 그동안 교육봉사나 다른 봉사 경험들이 많은데, 봉사를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냐고. 이때의 답변을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봉사를 오래 하다 보면, 어느 한순간에 지치게 되는데, 그 순간이 너무 무섭고 힘들었다고. 처음 봉사를 결심할 때의 그 열정과 감사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그 순간을 버틸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 그녀는 느꼈다. 봉사가 나를 살아가게 하는구나. 남이 아닌 내가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구나,라는 것을.


그렇게 신논현의 밤은 습한 공기와 뜨거운 바람과 친구들의 이야기소리로 꽉 찼다. 봉사를 하고, 그 이야기를 자서전에 담는다면 그녀의 인생은 뜻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게, 그리고 그렇게 살아낸 삶이 의미가 있는 삶일 거라는 것이 감사했다. 오랜 시간 고민하던 일에 드디어 끝이 보였고, 그녀는 벅찬 마음은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이 순간은 자서전에 남겨질 순간이리라, 다짐하며 그녀는 오늘을 기억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녀는 남자친구가 있는 청주 군부대로 달려갔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 중에 있었다. 스물일곱에 고무신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면회장에 들어가자, 그녀의 들뜬 마음에 불안이라는 감정이 힐끗 지나갔다.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어젯밤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며, 그녀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는 내내 남자친구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의 감정에 동조해 달라는 시그널을 보냈다.


그녀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은 알았지만, 그 계획까지 사랑해 줄지는 자신이 없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남자친구는 종이와 펜을 가져오더니, 묵묵히 자신의 인생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군복무 후 한국과 스위스, 두바이에 법인을 설립할 것이라고. 그렇게 사업이 안정화되면 그녀의 이름으로 재단을 차려주겠다고 했다. 젊은 여자의 몸으로 지금 당장 아프리카로 떠나는 것은 절대 안 된다며, 재단을 설립하고 그 재단을 통해 아프리카에 병원과 학교를 지으면서 마음껏 봉사하는 삶을 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늘 솔직했다. 남자친구가 사업으로 인해 벌어오는 돈을 다 그렇게 써도 되냐고 묻자, 그는 그게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자신의 사업이 안정화될 때까지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그녀의 꿈은 차후로 미룰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하며, 어떻게든 자신과 함께 하는 미래를 생각하는 남자친구가 고마웠다. 그는 그의 인생에서 절대로 그녀를 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그녀가 없는 삶은 애초에 고려하지도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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