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1남 1녀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는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릴 때부터 이국 땅에서 보모들의 손에 자랐다. 아버지의 사업은 석유값이 치솟을수록 수직상승 했고, 그 덕에 그녀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를 보살피는 보모만 3명, 운전기사만 2명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우스갯소리로 현관벨이 울리면 안방에서 전력질주를 해야 간신히 정문을 열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안에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방문객들이 돌아간다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어린 시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매일 햇빛이 내리쬐는 야외 수영장에서 신나게 물장구를 쳤던 기억, 아빠와 오빠가 골프를 치는 모습을 엄마와 함께 저 멀리서 바라보던 기억, 그리고 어른들로 가득한 호텔 행사에 오빠 손을 잡고 돌아다녔던 기억, 그 정도뿐이었다.
그녀는 조금 더 커서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다. 그녀와 오빠는 당시 가장 학비가 비싼 국제학교에 들어갔다. 학비가 워낙 비싼 나머지 보통의 사람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가뭄에 콩 나듯 있는 한국인들은 다 아버지가 대사이거나 삼성의 주요 임직원이었다. 한 마디로, 그녀처럼 학비를 전부 다 내면서 다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머니는 늘 그녀와 오빠의 한 학기 학비면 한국에서 아파트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의 그녀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무난한 생활을 했다. 물론 처음에는 영어를 할 줄 몰라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했지만, 어리고 명석한 두뇌로 그녀는 빠르게 언어를 흡수했다. ABC도 간신히 외우던 그녀는 1년 만에 초고속으로 성장해, 원어민과 다를 바 없는 언어를 구사했다. 그 이후로는 탄탄대로였다. 그녀의 쾌활한 성격 덕에 그녀 주변은 늘 친구들로 넘쳤다. 까르르하고 웃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6월 중순부터 8월까지 계속되는 여름방학을 가장 싫어했다. 여름방학이 되면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와 오빠의 손을 잡고 한국 외할머니댁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친구도,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이 몇 달을 지내야 했다. 외할머니 댁은 전라북도 정읍이라는 외진 시골이었다. 그 흔한 마트, 영화관, 쇼핑센터도 없었기에 그녀의 유일한 낙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시원한 슬러시였다. 그녀는 그때 처음 콜택시를 불러봤는데, 외할머니 댁 주소도 몰라 “동네에서 가장 큰 대문 있는 집이요”라고만 말했다. 그럼에도 택시 기사들은 외할머니댁을 잘도 찾아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외할머니댁도 아주 부유했다고 한다).
그녀는 조금 더 커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승부욕도 커져갔다. 중학생 때부터 하루에 3-4시간만 자면서 공부를 했다. 학원에서 이미 2년을 빠르게 진도를 나가고 있었는데, 그녀는 같은 반 언니 오빠들에게도 지고 싶지 않아 했다. 그 덕에 매월 반 1등을 했고, 같은 반 언니 오빠들은 학원 선생님의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부모님은 밤 10시가 죄면 칼같이 방 불을 끄러 다녔다. 그러나 그녀는 이불 아래에서 핸드폰 불빛으로 책들 읽었다. 이러한 그녀를 보며 주변에서는 그녀를 “독하다 “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독할수록 강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녀의 공부에는 큰 목적이 있지 않았다. 그저 성적으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선생님들이 싫었고, 공부를 못한다고 무시하는 반 친구들이 싫었다. 그렇게 그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시받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이 위축되지 않기 위해 공부했다.
그녀의 피 땀 눈물은 결국 수확을 거두었고, 그녀는 가뿐히 한국에 있는 명문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동문이 된 그녀를 모두가 축하해 주었고, 그녀 또한 한국 명문대생이 되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찼다. 풋풋한 대학생이 된 그녀는 곧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동안 수도 없이 많은 동아리에 참여했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새로운 활동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한 학기당 3-4개의 동아리는 기본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 누구보다 활발히 자신을 탐색하는 듯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의 대학시절을 가득 채워준 것은 공부보다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