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번 직장 동료들과 영어 이름 짓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 적 이 있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최근에 호주에 있는 타 회사들과 협업을 할 기회가 생겼는데, 이때 외국인들이 한국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우니, 각자 영어 이름을 짓자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이름 후보들이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영어 이름을 지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해외에서 오래 살다 온 나 역시도, 영어 이름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 나도 어머니에게 국제학교를 다니면서 왜 영어이름을 따로 지어주지 않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어머니는 영어이름이 불필요할 것 같아서 따로 지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내 이름이 외국인들이 부르기 어려운 이름이라는 것도 모르셨을 수 도 있겠다.
나의 기억은 고등학교 3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 굉장히 친하게 지내던 베트남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미국으로 대학 진학을 하면서 영어이름을 새로 짓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그동안 잘 쓰던 베트남 이름을 두고 왜 굳이 영어 이름을 새로 만드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정말 단순히 자기 이름이 발음하기가 어려워서라도 이야기했다. 베트남식 영어표기에 D를 ‘디귿’ 소리가 아니라 ‘지읃’ 소리로 읽는다. 그 친구의 이름은 D로 시작했기에, 그를 처음 만난 외국인들은 그를 늘 ‘디귿’으로 시작하는 엉뚱한 이름으로 불렀다. 이에 스트레스를 받은 그는,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살면, 이런 스트레스받는 일들이 더 많아질 거라는 생각에 새로운 영어 이름을 짓고자 했다. 이런 나와 친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화학 선생님은 열을 내며 반대했다.
“Make people pronounce your name correctly. You don’t need to change yourself just for others. If people can learn to say Aristotle, they can learn to say anything.”
선생님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도록,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르도록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외국에서는 이름에 굉장한 의미를 두는데, 이름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쉽게 영어 이름을 짓고, 쉽게 개명을 하지만, 외국에서는 도통 그러지 않는다. 새로운 이름을 짓는다는 건, 새로운 내가 되는 것이며 과거의 나를 버린다는 의미이니까.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수 도 있지만,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되니까.
국제학교에서 나는 교복을 입지 않았고, 머리도 자유롭게 기를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런 자율 복장과 두발 규정이 없는 것도 정체성 표현의 일환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입는 옷 스타일, 그리고 헤어 스타일이 결국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는 표현의 도구가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나는 이런 자유로운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네일아트를 하고, 화장을 하고, 여름에는 나시끈에 핫팬츠와 쫄쫄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녔다. 내 부모님은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셨기에, 내가 그런 꼴불견의 모습으로 학교를 다니면 “너 그렇게 입고 다녀도 되니?”라고 물었지만 나는 당당하게 “응! 옷에 욕설이나 술, 담배 같은 것만 안 그려져 있으면 된대!” 하며 학교를 갔다.
국제학교의 특성상,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이 모이게 된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배우며, 각자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방법에 대해 배운다. 자유로운 옷을 입게 하고, 자유로운 머리를 기르게 하는 것만큼 단순하지만 ‘우리는 너를 존중한다’라는 포용의 의미를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