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고 느끼는 것도 증상이라네요.

'중증까진 아닌 것 같은데?'라는 건 착각

by 알쏭달쏭

첫 약을 먹은 지 일주일쯤 지나 다시 정신과 진료실에 들어섰다. 첫 방문 날에는 선생님을 보자마자 울음이 터졌었는데, 두 번째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이미 모든 걸 말해버린 뒤라 더 보탤 이야기도 많지 않았다.


내 마음과는 달리 의사 선생님은 나를 보며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떠셨어요?"


"약을 먹고 나서 화를 안 냈어요. 하루 종일 좀 졸리긴 했는데, 아이들에게 화를 안 냈다는 게 다행이었어요. 이렇게 효과가 있기도 하나요?"


괜찮아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말끝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듣던 의사 선생님은 표정을 풀지 않고 다시 물으셨다.


"약이 잘 맞는 거예요. 운이 좋은 편이시고요. 무기력은 어떠세요?"


"무기력은 아직 있고, 좀 쳐지긴 해요."


진지해지신 표정에 나도 덩달아 웃음기를 조금 접어두게 되었다.


"하실 말씀이나 궁금하신 거 있나요?"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렇게 약효가 좋은 걸 보면 제가 그렇게 심한 건 아니었던 건 아닐까요?"


선생님은 이미 수없이 들어봤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제가 하루에 제일 많이 듣는 말이에요. '경증인 것 같다'는 느낌 자체가 증상입니다. 환자분은 중증우울증에서도 꽤 심한 편이에요. 그리고 보통 빨리 좋아지면, 다시 빨리 나빠지기도 합니다. 괜찮아졌다고 판단하려면 최소 6개월은 지켜봐야 해요. "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났다. '심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도 증상'이라니. 너무 귀여운 증상 같다고 생각했다.


말로만 듣던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내가 앓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불러왔다.


안심과 연민


병이라서 그런 거라면 해결책이 있다는 뜻이니까 안심이 되었다. 그 병을 혼자 견뎌온 나 자신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건 이제 더 이상 나를 게으르다고, 의지가 약하다고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성격이 문제라서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는 걸 누군가 공식적으로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진작에 왔더라면, 이렇게 깊어지기 전이 었을 텐데. 그래도 이제라도 왔다는 사실이 다행인 거겠지?


마지막으로 고민하던 걸 물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어요. 혹시 병을 부모님에게 알리는 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알려봤자 좋은 말을 들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상처만 될 수 있어요. 남편정도만 알고 계시면 충분합니다. 고혈압 같은 질병일 뿐이에요. 굳이 알릴 이유가 없어요. "


"네. 알겠습니다."


밝게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약 하나를 더 추가 처방받아서 집으로 왔다.


첫날에는 울음이 터졌는데, 불과 일주일 만에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되다니. 약의 세계는 정말 놀랍다.


나는 더 이상 '나약한 사람'이 아니다.

'약 먹는 사람'이다.(ㅋㅋㅋ)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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