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런 약을 먹게 될 줄이야
우울증 약을 먹은 지 삼일째다. 생각보다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화도 덜 내고, 차분하게 아이들을 돌본다. 조급하게 보채지도 않았다. 효과는 보통 2~3개월 뒤부터 나타난다고 했는데 나는 이상할 만큼 바로 느껴졌다. 무슨 약이든 효과가 빠른 편이다. 출산할 때 무통주사도 그랬다. 15분 뒤부터 좋아진다는 말이 무색하게 맞자마자 통증이 사라졌었다.
가장 먼저 달라진 건 반복적으로 '내가 사라지는 장면'을 떠올리던 오래된 습관이 줄어든 것이다. 의욕은 아직도 많지 않고, 하루 종일 졸린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걸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틈틈이 쉬며 나를 챙긴다. 아침에는 양배추 샐러드를 먹었다. 좋은 걸 먹는 것도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탄수화물을 많이 먹으면 인슐린이 과다 분비되고, 그게 세로토닌을 억제한다는 말을 듣고 의식적으로 야채와 단백질위주 식단으로 바꾸고 있다.
남편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제껏 이해되지 않던 모든 실마리가 풀렸다고 말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행동들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단순히 게으르고 겁이 많다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한 모습들이었다고 했다.
5년 전 첫 운전연수를 20시간 받은 후였다. 남편 옆에서 운전석에 앉아 지하터널을 빠져나오던 순간, 남편이 좌측깜빡이를 켜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편이 점점 더 큰소리로 외쳤고, 그제야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지하터널에서부터 벽에 그대로 들이받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사고가 정지했다.
그 이후로 핸들을 잡지 않았다. 또다시 그때의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2년이 더 지나 남편의 요구로 40시간 운전연수를 다시 받게 되었다. 그제야 집 근처부터 조금씩 운전을 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운전대를 잡는 게 무섭다. 내가 사람을 치거나 남에게 피해를 줄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여있다. 흡사 내가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연습하면 된다고 말하는 남편의 말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운전을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다시 잡으려면 죽을 것 같은 공포를 이겨내야만 잡을 수 있다. 여전히 벌벌 떨며 운전대를 잡게 된다,
더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예물을 보러 갔을 때도 그랬다. 목걸이를 해보고 나서 점원이 '어떠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굳어있었다. 나는 그 시간이 아주 짧았다고 느꼈고 전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매장을 나와 남편이 말했다.
" 너무 무례했어. 사람이 말을 하는데 아무 대답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잖아."
그런데 나는 왜 대답을 못했는지, 그 상황이 그렇게 보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왜 이러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남의 작은 말에 상처받고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상대가 특별한 의도를 가진 게 아니라 내가 더 크게 받아들이는 거리고. 그 원인이 '내 성격'이 아니라 '내 뇌'라면 그 말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됐다. 내가 느끼는 괴로움이 내 뇌의 착각에서 비롯된 거라면 그걸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게 병인 지 몰랐었을 때, 애들에게 해선 안 되는 말을 했다
"너희 키우기 힘들어서 엄마는 못 키울 것 같아."
제리가 나에게 어제도, 오늘도 그 말을 다시 꺼냈다. 아이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아이에게 말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미안하다고 잊어달라고 이야기하며 사죄했다.
"엄마가 아파서 그랬어. 엄마가 치료받고 있으니까 이제 나아질 거야. 꼭 고쳐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