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내가 건네는 조용한 위로
가끔 내 마지막 날을 상상해 본다. 사랑하는 딸들과 남편이 곁에 있겠지. 딸들이 결혼을 했다면 사위도, 또 아이가 있다면 손자와 손녀도 곁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주 먼 미래를 그리다가도, 어느 순간 나는 다시 지금으로 돌아온다.
내 나이는 서른아홉,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이 나이로 왔다면, 지금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더 또렷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고 나면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유독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웠던 작은 손, 혀 짧은 말투, 둘이서 작당모의를 하던 동그란 뒷모습, 잠들기 전 코끝에 닿던 따뜻한 숨. 그 모든 순간을 다시 품어 안고 싶다. 아이들의 눈빛 하나라도 놓칠까 봐, 내 기억 속에 오래오래 가두고 싶어진다.
그래서 하루를 더 소중하게 바라보려 한다. 아침의 따뜻한 햇빛, 아이들의 웃음, 아무도 없는 집의 고요함까지 선물처럼 느껴진다.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바쁘기만 했던 지난날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조금은 여유롭다. 10년 전, 앞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던 시간을 지나, 나는 그때 상상했던 삶의 지점에 어느 정도 닿아 있다.
이제는 나 자신을 챙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운동, 글쓰기, 휴식은 나를 살아 있게 만들었다. 마음의 근육이 조금씩 단단해지면서, 덜 비교하고 , 더 느긋해지고, 더 사랑하게 되는 삶을 배워가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안은 여전히 나와 함께 숨 쉬고 있다.
'지금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문득문득 떠오르는 질문 때문이다. 부모라면 아이들을 지키기에 충분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압박은 늘 따라붙는다. 무엇으로 그걸 해낼 수 있을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곧 불혹을 앞도고 있는데도, 방향을 잃은 돛단배처럼 헤매는 기분이다.
하지만 삶의 끝자락에 서있던 미래의 내가 온다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그 모든 걱정은 결국 다 부질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조금 더 즐겨도 된다."
죽음을 떠올릴 때면 지금의 불안이 얼마나 가벼운지 조금은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는 잠시 걱정을 내려놓고 오늘을 살아보기로 한다.
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아침마다 재촉하며 화내던 엄마였을까.
눈을 맞추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엄마였을까.
더 잘 살기 위해 스스로를 다독이던 엄마였을까.
무엇보다, 내가 정말 전하고 싶었던 사랑을 아이들이 알아주었을까.
나는 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네가 무엇이 되어도, 엄마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바닥에 물을 흘려도, 실수를 해도, 울고 떼를 써도 사랑한다. 영어를 못해도 사랑하고, 아무것도 잘하지 않아도 사랑한다. 그리고 만약 엄마의 목숨으로 너희를 살릴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면, 단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너희를 살릴 거다. 그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한다. "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을 산다. 영원할 것처럼 욕심부리고,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끝을 모른다. 기억이라는 것을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늘 '죽음'을 같이 떠올렸다. 그래서 다짐했다.
'치사하게 살지 말자. 가져갈 수도 없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자.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자. 결국 남는 건 그것뿐이니까.'
평화로운 평일 오후다. 사람들은 각자 맡은 일을 한다. 누군가는 회의실에 앉아 있고, 누군가는 커피를 마시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나는 아침에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며, 브런치에 글을 썼다. 생각이 떠오를 때 바로 적어두지 않으면 금세 스쳐 지나가버리기에, 오늘도 이렇게 한 문장을 남긴다.
나를 위해, 그리고 언젠가 이 글을 누군가에게 작은 숨결이 닿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