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생애 첫 방문
몇 년 전부터 지인들의 정신과 추천을 받아 네이버에 조용히 저장해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예민하고 소심해서 그렇겠지'하며 버티기만 했다.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으면 잠깐 숨이 트이는 것 같아, 그 정도면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정신과에 가서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에 최후의 보루로 남겨놓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렇게 살아서는 정말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침내 병원 문을 열었다.
의사 선생님 앞에 앉자마자 이유를 설명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나왔다. 잠시 마음을 다 잡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데 자꾸 무기력해져요. 그냥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남들이 보기에 힘들게 없는 삶인데도 저는 힘든 게 너무 괴로워요. 자책감도 있고, 작은 말에도 예민해지고, 쉽게 우울해져요. 아이들한테 화내고 나면 또 스스로를 계속 탓하게 되고."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차분하게 들어주셨다. 간단한 체크리스트 검사를 진행한 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증상이 꽤 심한 편이에요. 이건 기질, 유전, 노화로 인해 오는 병이고 소프트웨어문제보다 하드웨어 문제예요. 심리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보다는 뇌의 문제입니다. 뇌는 사용하지 않는 신경회로를 잘라내는데, 그게 오래되면 치매로도 이어지죠. 약은 그 끊어진 연결을 다시 붙여주는 역할을 해요. 보통 2-3개월이면 '살만해졌다'는 느낌을 받을 거고요. 최소 3년은 먹어야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쪽이 조금 놓였다.
"그럼 직장에서 사람 말 때문에 힘들었던 것도, 운전을 3년이나 했는데도 무서운 것도 다 이 병 때문인 건가요? "
"전형적인 증상이에요. 직장인인데 직장을 못 버티겠다거나, 주부인데 집안일과 육아가 너무 힘들다거나, 심지어 의사인데 환자랑 자꾸 다툰다거나.. 다 똑같습니다. "
순간, 머릿속이 맑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늘 '내 상황이 나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들까'라고 자책했다. 원인을 찾지 못해 스스로를 나약하다며 몰아세웠었는데, 그게 병 때문이었다니.
"지금은 배터리가 충전되지 않는 상태라고 보면 돼요. 그래서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못 하겠고, 남들이 무심하게 던진 말에도 상처받는 겁니다. 좋아졌다가도 다시 가라앉고, 그렇게 깊어져요. 20년 동안 앓았다면 20년 약 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장기적인 병입니다. 꾸준히 치료해야 다시 악화되지 않아요. "
나는 걱정되던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
"제 딸들이 이런 제 모습을 오래 보며 자랐는데, 아이들도 치료가 필요할까요?"
"유치원 적응이 어렵다거나 친구들과 갈등이 있다면 상담이 필요하겠지만, 별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대로 지켜보면 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태도를 그대로 배우니까, 부모가 치료를 받는 게 더 중요해요. "
잠들기 전 복용하는 약을 처방받았다. 다른 약과 함께 먹어도 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중단하면 안 된다고 했다.
병원에서 나오는 길, 아주 오랜만에 희미한 희망이 떠올랐다.
'내 마음도 다시 괜찮아질 수 있을까.'
일단은 치료해 보기로 했다. 살아낼 힘이 다시 연결될 거라는 믿음이 조금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