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비평

프루스트적 관점과 불교 사상

by Lesley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다양한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호평을 받았으나,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아쉽다는 평이 많았다. 이 영화는 '인연', '전생' 등의 동양적이고 불교적인 개념들이 주제 의식을 형성하는데, 서양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신비롭고 흥미로운 소재로 여겨지지만 동양 문화권에서는 식상하게 느껴지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아쉬운 한국어 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단순히 동양적인 외국에서 흥행한 영화로만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담고 있는 메시지에서 찾아볼만한 것들이 꽤 있다고 생각한다.


“네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여기 존재하지 않아. 그러나 그 어린애는 존재했어. 너 앞에 앉아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야. 이십 년 전에 난 그 애를 너와 함께 두고 온 거야.”


이 대사를 듣고 이 영화를 프루스트적 관점에서도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면 불교적 사상과 프루스트 철학은 꽤 닮은 점이 많다.


우선 불교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살펴보자.


1. 넓은 의미의 윤회

윤회 사상은 전세, 현생, 내세가 하나의 수레바퀴처럼 돌아간다는 삶의 순환과 변화의 개념을 담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해성과 나영 모두 '전생'의 개념을 언급하며 이러한 거시적인 윤회사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와 나는 사실 전생에 인연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만난 것이라고.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좀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윤회도 찾아볼 수 있다. 해성과 나영은 그들이 서로 만난 12살 시절부터 각자 자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해 여러 번의 순환과 성장을 거치며 변화한다. 해성과 노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12살에 만났다가 각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다가 20대에 다시 SNS를 통해 연결되어 만나고, 또다시 관계가 끊어졌다가 마치 관계가 순환하듯 12년 뒤 다시 연결된다. 이렇듯 이 영화는 인간의 삶과 관계가 윤회한다는 것을 미시적, 거시적 관점 모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2. 무소유와 욕망의 해방

극 중 나영은 12살일 때 한국에 있으면 노벨상을 탈 수 없기에 미국으로 간다고 이야기한다. 이후에는 퓰리처상을 받고 싶다고 하고, 마지막으로 뉴욕에서 해성을 만났을 때는 더 이상 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젊은 시절 야망이 가득하고 일이 너무나 중요했던 나영은 커리어 때문에 해성과의 연락도 중단하고자 했으나, 결혼하고 시간이 흐른 후 나영은 비록 노벨상을 타지 못했지만 자유로워 보인다. 나영과 해성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만 서로의 선을 넘지 않는다. 서로를 소유하려들지 않고 그들의 인연은 여기까지라는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렇듯 이 영화에서는 무소유와 욕망의 해방을 통해 자유와 내면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불교적 사상을 찾아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프루스트적 관점에서는 어떨까?


1. 시간과 기억의 변화

시간의 흐름은 마치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는 것과 같다.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우리의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고, 1초 전에 있었던 나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없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우리가 타인을 진정한 의미에서 알 수 없는 한 가지 이유는 타인에게서 얻는 첫인상이 딱히 정확하지 않을뿐더러 우리가 첫인상을 바로잡는 사이에 타인은 이미 변화를 겪고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은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다. 기억 속의 상대는 시간이 흐르며 이미 소멸된 대상이지만, 기억을 통해 우리는 그 대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앞에 언급한 대사에서 이러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이십 년 전에 존재했던 나영은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지만 해성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남아있다.


“변화하는 존재와 불변하는 기억 사이의 대립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해성은 12살에 만났던 나영, 20대에 화상통화로 만났던 나영의 기억을 가지고 12년이 더 흐른 뒤 뉴욕으로 향한다. 그러나 나영은 이미 결혼한 지 오래고, 남편 아서는 아주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 해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나영을 포기하는 일 밖에 없고, 둘의 대화에서는 애틋하지만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렇게 변화하는 존재와 불변하는 기억 사이의 대립이 해성에게 이러한 내적 갈등을 유발하는 모습에서 프루스트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었다.


2. 사랑은 우리 내부에 존재한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사랑은 이미 우리 내부에 존재한다. 즉, 우리의 주관적인 상상력이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환영 속에서 만들어낸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는 질베르트라는 인물을 짝사랑하며 그녀는 한 때 화자에게 전부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사랑은 끊임없이 투영할 대상을 찾고, 그 대상은 계속해서 바뀔 수 있다. 영화 속 해성과 나영도 마찬가지다. 둘은 20대에 다시 SNS를 통해 만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매우 특별한 인연임을 느끼지만, 12년이 흐르는 동안 각자 다른 사람과 만난다. 결국 요약하자면 해성과 나영에게 서로는 기억 속의 첫사랑에 불과하고 그저 환영일 뿐인 의미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고, 바쁘게 살아가느라 놓치기 쉬운 삶의 본질을 되돌아볼 수 있다. 나영이 해성에 대해 남편 아서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나영은 해성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 ‘한국인 같지 않은 느낌’과 어떤 면에선 ‘더 한국인 같은 느낌’을 동시에 느꼈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이런 특징을 잘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나영은 한국어로 잠꼬대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어쩌면 나영은 해성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여 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기만 해도 불교 사상과 프루스트의 사상은 비슷한 점이 많지만, 마지막에 해성이 택시를 타고 가기 전 나영이 배웅해 주는 장면에서 이 두 사상이 서로 만나 결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담담하게 이별함으로써 서로를 전생의 인연이나 옛 기억 속에 남겨두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다. 서로를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영화가 마무리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으며, 프루스트에 의하면 소유하기를 갈망하는 그 무언가는 소유하고 있지 않을 때만 그곳에 존재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를 통해 예술로써 승화되었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프루스트에게 있어, 예술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예술이며, 이데아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해성과 나영의 기억 속에서 남아있는 서로는 단순히 서로의 내면과 본모습을 발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영화화됨으로써 수많은 관객들도 스스로의 내면을 살펴볼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친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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