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개인적인, 침묵의 기록

말을 잃어가는 과정

by 가장자리

내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좋게 말하면,

‘차분해지는 과정’


조금 더 날 것으로는,

‘말을 잃어가는 과정’


나는 왜인지 좀 나대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크게 한 번 혼났다.


중학교 교실이었다.

나는 웃기고 싶은 마음에

선생님께 아마도, 무례할 수 있는 말을 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화가 났고,

나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혼났다.


어린 마음에

선생님을 화나게 하고 싶은 생각은 당연히 없었고,

그저 관심받고 싶었던 생각뿐이었다.


어쨌든, 무례했고, 화났고, 혼났다.


그 뒤로 말을 조심하게 됐다.


-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고등학생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험담을 듣고 당사자에게 전했다.


왜냐하면,

그 당사자와 나는 같은 무리에 있는

소위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게 의리이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파국이었다.

친구는 험담을 한 사람을 찾아가서 따졌으며,

그 사람과 같은 반이었던 나는

일 년 내내 눈치만 봤다.


-


성인이 되고 마주한 세상은

암묵적인 규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규칙을 모르거나 규칙에 위배되는 사람은

‘눈치 없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그 규칙이란 것은

어디 법전에 쓰여있지도,

누가 먼저 알려주지도 않았기에

사람들은 ‘이건가? 아닌가? 맞나? 틀린가?’하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래.

어쩌면 눈치 보는 것,

그 자체가 규칙이었을지도 모른다.


-


말은 위험하다고 배웠기에,

상대의 기분과 상황의 맥락을 고려하고

적절한 단어와 표현을 고르고 골라야만

나는 내 생각을 겨우 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와 내 생각을 재단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빠르고 쉬웠다.


“상식적으로”

“당연히”


나는 도저히

당연한 상식과 규범을 설득할 재간이 없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그냥, ‘그러려니’ 맞추면 되는데.

그게 싫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험담하는 일에는

그저 맞장구만 치면 되는데.


어렸을 적 내 모습이 떠올라서일까.

난 늘 선뜻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눈치가 없진 않은데,

그렇다고 맞춰주지도 않는 사람.


관계가 유지되기는 하는데,

‘우리’로 더 깊어지지는 않는 사람.


그래서 나는 늘 관계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번역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