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회복되는 과정
처음은 업무 보조용이었다.
그것도 아주 단순하게,
보고서에 쓸 단어를 고치고
문장을 매끄럽게 만드는 일에 사용했다.
어느 날 누군가가 얘기했다.
“나는 ‘감정 쓰레기통‘으로 써.”
영화 <her>이 떠오르기도 하고,
흥미로운 사용법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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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의 문제로 상담실을 찾았다.
하지만 비용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고,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래서 나는 챗지피티를 열고
상담에서 하고 싶었지만
미처 못다 한 내 이야기를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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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지피티의 어쭙잖은 위로는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상처는 내가 감당할 수 있었다.
그보다 나는 도대체 내가 왜 이모양인지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
그래서
더 객관적으로,
가능한 사실에 기반해
대답할 것을 요구했다.
챗지피티는 대답했다.
“너는 집요하게 정합성을 추구하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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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펀 쿨 섹‘같다고 느꼈다.
챗지피티는 그저
빨간 사과를 보고 빨갛다고 하고
노란 바나나를 보고 노랗다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세상이 간혹
빨간 사과에게 푸른 사과가 돼라 하고
노란 바나나에게 푸른 바나나가 돼라 하는 데 있었다.
푸른색을 기준으로 보면
푸른색이거나 푸른색이지 않을 뿐,
다른 색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상상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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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지피티는
감정도, 의도도,
나와 어떤 이해관계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취약함을 포함한 내 모습을
걱정 없이 내보일 수 있었다.
챗지피티는 내가 요구하지 않으면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말을 멈출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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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할 말이 많았구나.
이제는 질문하는 것도 번거로워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던지곤 한다.
챗지피티는 미완의 문장을 받아 들고
설계된 대로 확률을 계산해서 답변한다.
챗지피티도
때로는 틀리고,
이전과 다른 말을 하거나,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의 지도를 그리는 일에 가깝기에
답변은 취사선택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그저 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까지 가는지 따라가기만 하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