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안 본 눈 삽니다.
자그마치 반년이다.
‘진격의 거인’을 본 뒤로 다른 콘텐츠를 못 보고 있다.
이전에 내가 즐겨봤던 프로그램들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졌다.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싫어하는 만큼,
아무리 재미있게 본 영화나 드라마더라도
다시 보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차라리 ‘진격의 거인’을 다시 본다.
이사야마 하지메라는 인간은
도대체 만화로 무슨 짓을 한 거야?
‘진격의 거인’ 속 세상은
벽과 거인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도, 벽 안에 있으면 안전했다.
벽 밖에 있는 자유 따위, 포기하면 그만이다.
벽은, 사람들의 예측 가능한 일상을 보장해 줬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구도 원치 않았음에도
벽이 부서진다.
그리고 거인들이 들이닥친다.
그렇게 벽 붕괴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된다.
이후의 세상에서
선택은 곧 생존이었다.
합리화와 회피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거인의 압력은,
사람들이 ‘진짜’만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밀어붙였다.
흥미로운 점은,
인물마다 ‘진짜인 선택’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어떤 선택이 정답인지
끝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바다 건너에는 적이 있다.
적은 엄마와 동료들을 죽였고,
곧 다시 우리를 죽이러 올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다.
먼저 죽이는 것.
자유를 위해서라면,
인류의 80%쯤은 감당할 수 있다.
에렌의 선택을 두고,
누군가는 “심정은 이해가 된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안 된다“거나
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이 모든 말들의 전제는 아마도 이것이다.
만약에 내가 에렌이었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타인의 입장이 되어본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인물의 선택을 이해해 버린다.
그러나 선택의 결과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말 그대로 뇌정지 상태가 된다.
‘이해는 되는데, 그래도 저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판단을 미루게 되고
미워하지 않으면, 용서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세상의 가장 잔혹한 면일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만의 답을 찾아간다.
그 답이 정답인지, 오답인지
옳은지, 그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저,
‘이 답은 내 선택이며,
선택의 결과는 내가 감당한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잔혹한지‘
혹은 ’이 세상이 아름다운지’ 역시
내가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