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애] 글 시리즈-3
지난 연애를 하기 전에는 서로 치고받고 스트레스받아가면서도 자기 파괴적인 연애를 끝내지 못하는 커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헤어지자' 말 한마디를 못해서 시간낭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이별을 겪은 후 머리로 그 말 한마디를 해야 함을 아는 것과 그 사람 앞에서 입이 떼는 건 다른 차원의 벽을 깨는 것만큼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 했던 추억을 뒤로한 채 여전히 내 앞에서 진심을 보여주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모진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차라리 언성을 높이며 사납게 헤어졌다면 덜 미안했을까. 무거운 말을 할 용기를 내기 위해 술의 힘을 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별의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믿었다. 잠시 아프고 난 후 각자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을 거라는 걸 잘 알아서 몇 번을 다짐하다가도 나를 보며 웃는 사람 앞에서 무너졌던 이별을 말할 결심을 한다. 가끔 지나다가 생각이 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서로를 위한 결정을 내렸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제 나는 지난 연애로부터 많이 해방된 듯하다. 새로운 사랑을 기다릴 정도로 말이다.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그 끝은 나름 절절했던 이 만남은 1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줄곧 나를 괴롭힌다. 어떨 때는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없애고 싶은 아픈 기억으로 다가왔다가, 그다음 날은 전보다 속이 단단해진 나를 만들어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아직 지난 연애를 어떠하다고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지난 연애를 바라보는 백 가지 정도의 서로 다른 관점이 있다고 치면, 이제 한 절반 넘게 떠올렸으려나. 한 친구는 1년이나 지났으니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할 수 있지 않냐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아직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선명한 기억이다. 난 좀 보수적인 편이니까 한 5년 정도 지나면 그때는 정말 인간 대 인간으로 안부인사 정도는 할 수 있으려나.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 지금 사랑이 마지막인 듯 후회 없이 열정적으로 사랑했으면 좋겠다. 이러지 말아야지 수천번 했던 다짐을 이기는 마음이라면 그만큼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증거니까. 그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만큼 절절히 사랑하고 나면 왠지 나에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지만, 사랑하는 사이에는 그 어떤 시간을 보냈든 그 모든 시간이 나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래서 또 한 번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을 궁금해했을 테니, 비록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지만 그 사람은 자신만의 인생을 잘 살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14번째 관점).
나는 확실히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 더욱 신중해졌다. 이제 지난 연애가 힘들었던 건 몸에 좋은 쓴 약으로 느껴진다. 지난 연애 전의 나는 환상 속에 둥둥 떠 있는 드라마나 웹툰 속 여자 주인공 같은 마음으로 살았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현실을 생각하고 마음을 분리시킬 줄 알게 되었다.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 또 한 번 지난 인연에게 고마움을 느낀다(89번째 관점).
그리고 사람을 함부로 사귀면 혼자 있느니 못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주었다. 어쩌면 그 사람도 보통 남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속 깊은 곳의 외로움을 내 옆의 사람으로서 채운다는 것 말이다. 다만, 그 사람은 나로부터 무언갈 채울 수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던 게 관계 지속에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연애 초반부터 문득 떠오르는 불안감은 그런 데서 오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53번째 관점).
시간이 지나면서 지난 연애를 곱씹어보면 몰랐던 것들을 하나씩 깨닫게 된다. 가족과 친구가 아닌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사랑받는 느낌은 매우 낯설었고 두려움이 많았던 나는 그 감정을 의심했고 믿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깨닫는 건, 아, 그 사람은 정말 나를 좋아했구나, 어쩌면 그 사람이 말하는 게 진짜 사랑일 수도 있었겠다, 싶다. 그가 주는 사랑은 이유와 조건이 없는 일관된 사랑이었다. 내가 뭘 해서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나여서 좋다는 그런 감정이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그의 마음을 믿질 못했다. 그는 나조차도 믿지 못한 그 마음을 나에게서 주고 나와 전혀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기분이 뭔지 알게 해 준 사람이다. 누구나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말 운이 좋았으며 소중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음번에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을 때는 조금 덜 당황하고 조금 더 믿어봐야지. 정말 이 세상에 누군가는, 나를 이유 없이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한 번 믿어봐야지. 그는 아직 세상에 무서운 게 많은 나에게 이런 마음을 낼 수 있는 용기를 준 사람이었다(35번째 관점).
근데 뭐가 되었든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호기심이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남을 이어나간 것이 문제였다. 나는 마음이란 게 같이 붙어있으면 생기는 거라고 생각해 그 사람이 나를 기다려줄 수 있다는 말을 믿고 그냥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게 정말 문제였다. 그러니 다음에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야겠다. 다른 건 모르겠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다음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거다(99번째 관점).
나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 내가 나 스스로를 괴롭게 했다. 그렇다고 과거의 나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나는 어렸고 처음 연애를 해봤기에 모든 것이 어렵고 새로웠다. 그래도 나를 너무 힘들게 하는 연애라는 것을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지난 연애] 글 시리즈를 적는 내내 다음에는 내 이름 따라 지혜로운 연애를 해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슬기로운 생활'이라는 교과서가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 글은 나에게 '슬기로운 연애생활' 같은 지침이다. 다음 사람을 만날 때에는 너무 헤매지 말고 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슬기로운 연애생활] 글 시리즈를 발행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다. 건강하고 바람직한 연애를 하기 위한 지침서, 여기서 이만 글을 마무리하겠다.
[지난 연애] 글 시리즈
만남-헤어질 결심-지난 연애를 바라보는 백 가지 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