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지난 연애] 글 시리즈-2

by 경진


그건 너를 위한 선택이지 우리를 위한 선택은 아니야.


스킨십 사건이 있은 뒤로 김이 줄곧 하던 말이자 그에게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다. 이 말을 듣기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순간부터 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그 사람에게 의지할 수 없는 것도 맞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맞다. 그 사람이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도 맞고 내가 다른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것도 맞다. 그 사람의 환경이 가난한 것과 별개로 명확한 진로가 없는 게 가장 못 미더웠다. 아직 졸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건 있으나 정확한 목표 설정을 해서 나아가는 데 있어 여러 장애물들이 많았다. 그 장애물 중 하나가 그의 가족과 집안환경이었다. 그 사람은 미국에 가서 군인이 되겠다, 미국에서 신학대학원을 다닐 생각이다, 경찰직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지만, 모두 말뿐이었을 뿐 어느 것 하나 시도조차 못한 상태에서 난 그 무엇도 믿기 힘들었다. 그 사람은 확신에 찬 말을 하지만 난 정말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헤어졌다. 사실 그 이유가 제일 컸다. 아무리 작은 꿈이라도 꿈을 이룬 사람과 이루지 못한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임을 깨달았다.


김은 한결같이 내게 잘해주었지만 난 그 모습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에게는 차갑고 나에게만 따뜻한 그가 지금은 내게 이렇게 잘해주지만 언젠가는 돌변할 수 있지 않을까 의심했다. 감정이 격해지기 전에 대화를 멈추거나 묵혀둔 감정을 마음에 콕콕 박히는 아픈 말로 쏟아내는 것 말고 그때마다 잘 얘기했더라면 지난 연애도 남들의 보통 연애처럼 순탄하게 이어졌을까. 솔직할 때도 있었지만 과거의 아픈 이야기를 털어내는 것 말고 진짜 순간순간의 감정을 알고 싶었다. 눈물을 흘리거나 화내는 모습을 봤더라면 조금 더 믿을 수 있었을까. 오랫동안 묵혀둔 감정이 깊은 건지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걸 어려워했다. 조금만 조절하지 않으면 날 것 그대로의 단어가 나와서 그런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공사장에서 일을 하시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셔서 무릎이 안 좋으신 아버지(하지만 여전히 고기잡이와 같은 중노동을 나가시는 듯했다), 학원에서 일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아직 고등학생인 6살 차이 나는 여동생까지, 무엇하나 내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그 와중에 그 사람이 잘하는 건 바이올린이었다. 이 상태에서 결혼하면 정말 꿈을 먹고살자는 건데, 난 그 정도로 그 사람을 좋아하지도, 생각이 어리지도 않았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일찍 결혼하고 싶었고, 기다리던 연애를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는 건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사귀는 내내 이 사람이랑 결혼하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 줄곧 생각했었다. 이런 나에게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은 돈을 벌면 가족을 부양할 것이라는 말은 내가 그 사람과 결혼하면 그의 가족을 부양하는 데 나도 동참해야 한다는 걸로 들렸다.


그의 삶에서 어려웠던 이야기를 하나씩 들을 때마다 내 마음에 크고 작은 무게가 하나씩 가중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지난 일이라고, 지금은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그때가 그의 인생을 처음 듣는 시간이었다. 그에게는 지난 일이지만, 나는 그때가 인생의 모든 어려운 역사를 한꺼번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감정에 대한 감도가 몹시 예민한 사람이다. 그래서 크든 작든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크게 여여하지 않으려고 하며, 되도록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그러한 면이 그에게는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그의 어두운 면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파도가 몰아치듯 다가온 그의 인생의 굴곡 속에서 나는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유약한 사람인지 단단한 사람인지 도저히 분간하기 어려워졌을 때, 두 손 두 발 다 들고 그에게서 있는 힘껏 도망치려 노력하려 했다.


그는 사회학과 신학, 철학 공부를 좋아했다. 처음에는 뭔가 사연이 있는듯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그의 진짜 모습이 알고 싶어졌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수많은 좌절 속에서 받은 상처가 많은 어린아이였다. 그 사람을 알아갈수록 내면에 켜켜이 쌓인 지독한 외로움과 가정환경상 자유롭게 꿈을 펼칠 수 없다는 패배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단단해 보이는 외모 속에 어린 내면을 감추려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 속상했지만 연민만으로 관계를 지속해 나갈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 그는 더 이상 나에게 있어 한 남자가 아니라, 딱한 마음이 드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는 비록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모자람 없이 사랑받으면서 컸다고 했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그 환경 속에서 이뤄낸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그와 헤어져야 하는 이유들을 떠올렸다. 헤어지기 싫은 사람이 생기면 내 마음에서 먼저 그 사람을 떠나보내는 건 나의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어차피 멀어지면 지금처럼 친하게 지내기 어려울 텐데, 지금부터 미리 거리를 둬서 상처의 깊이를 줄여보자는 마음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건 내가 애착유형 중 회피유형이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연애에 몰입해 있던 나는 그와 결혼했을 때 생길 갖가지 시나리오를 그려냈다. 그리고 그 끝은 매번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일상을 묻는 그가 부담스러워졌다. 마치 내 사생활을 다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나는 나의 가장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게 아니라 놀고 있는 걸 알면 나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피어올랐다. 마치 트루먼쇼에 갇힌 주인공처럼 내 모든 일상이 밝혀지는 것 같아 불쾌했고, 그러한 기분이 드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더 불안했다. 헤어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불쑥 전화를 걸었고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지난 연애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김은 첫 여자친구에게 성적 데이트폭력을 당했다. 그의 설명으로 미루어보자면 정황상 그랬다. 내가 처음 데이트폭력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그는 그 표현이 맞다고 긍정했기에 나는 아예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난 연애에서 있었던 일을 묘사할 때마다 매우 괴로워하며 말을 꺼냈고,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는 로맨스 영화조차 보기 불편해졌다고 말했다. 나는 데이트폭력을 당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진 후 전화로 그 일에 대해 다시 물었을 때는, 내가 상상한 그런 일은 일절 없다고 말했다. X의 집을 갈 때마다 3kg씩 살이 빠졌던 이유는, X를 업고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기 때문이라 한다. 상대가 유혹을 하며 잠자리를 요구하긴 했지만, 매번 거절했다고 한다. 그 여자가 집에서 자는 동안 티브이를 보다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정말이지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오랜 기간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히던 그의 어두운 과거가 내 상상이었다니. 지금까지 나는 무엇에 그렇게 분노하며 불안에 떨고 별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증오하고 김을 연민했을까. 나는 뭐 때문에 그 사람과 수차례의 진지한 대화를 하고 그때마다 마음이 아팠을까. 그런데 왜 우리는 수차례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눌 동안 서로가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는 걸 왜 한차례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엉키고 설켰다고 생각한 오해가 잡아당긴 실오라기 하나로 풀리다니 그건 정말 다 내 오만과 편견 때문이었나. 어설픈 그의 설명과 풍부한 나의 상상력이 맞물려 이와 같은 결말이 만들어졌을까. 무엇이 되었든 우린 정말 서로 잘 안 맞았나 보다. 그간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했지만, 알맹이가 없는 장난 섞인 말만 오갔고, 정작 필요한 대화는 하지 못한 길고 긴 그 대화 속에서 알아낸 진실은 없었다. 헤어진 결심을 낸 n번째 이유다.


[지난 연애] 글 시리즈

만남-헤어질 결심-지난 연애를 바라보는 백 가지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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