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램즈이어 Mar 20. 2024

해수욕장의 눈사람

안신영 작가님 <하율이 그림이~> 댓글 동화

## 해수욕장에서의 해후

    

  겨울 요정은 나를 단단히 붙들고 모래 위를 걸었다. 뒤따르는 어린이들을 무사히 좇아냈지만 여전히 멀리서 써퍼들이 미심쩍은 눈길로 이쪽을 쳐다본다. 여기저기 파도 속에 불가사리도 둥둥 떠다니고 있다. 힐긋힐긋 우리를 구경하는 것이 분명 겨울 요정이 바다 요정에게 비밀을 흘렸음이 틀림없다.

 아~ 저 멀리 파라솔 아래 누워있는 하율 공주! 가슴이 쿵쾅거리며 어지러워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네. 우리의 험난한 여정도 이제 끝이 보이나 보다. 과연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몇 마디나 나눌 수 있을까?

‘넘 보고 싶었어요.’ 아니면

‘왜 절 데려가지 않으셨어요?’

 마음이 벅차올라 그동안의 서러움과 고생이 싹 다 사라져 버렸다. 하율 공주랑 헤어진 후 얼마나 슬픈 나날이 계속되었던가? 공주를 찾아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여행이었던가? 여기 여름나라에서도 역시 공주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렇지만 우리가 처음 만났던 2월 그날의 모습을 난 영원히 잊을 수 없다.     


## 2월 강원도 펜션에서     


 “우리 공주님 어서 나와 봐. 아빠가 멋진 눈사람 만들었어. 너 키 만해!”

 그날 아침 햇살 아래 걸어 나오는 하율 공주를 처음 보았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녀들은 모두 이처럼 예쁜 것일까? 공주님이라서 그런 걸까?

 “에이 근데 왜 이리 못 생겼어. 내가 다시 그려야지!”

 공주는 깡충깡충 뛰어 나뭇가지를 주워 오더니 내 얼굴을 고치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표정이 방긋 웃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와! 멋지다. 아빠 그치?”

“그래 근사하다. 역시 우리 공주님 그리기 실력은 최고야~”

 그날 하루 종일 공주는 내 주변을 맴돌았다. 오후에는 급기야 친구들 여럿을 데려와 구경시켰다. 역시 소녀들 중에 공주가 가장 예뻤다.

 하루는 온종일 방 안에서 싹둑싹둑 하더니 보라색 뭔가를 가지고 나왔다. 그것을 내 머리에 씌우고 목에 메 주었다. 그리고는 아빠를 크게 불렀다.

“아빠 아빠! 눈사람 단장 시켰어요.”

“와우 중절모와 나비넥타이네. 멋진 신사가 되었는 걸? 오늘 저녁 함께 파티에 가보렴!”

 공주는 좋아라 내 주변을 뛰어다녔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멋져 멋져. 뽀뽀해 줄게~ 쪽!”

 깜놀! 기습 키스는 내 혼을 빼놓았다. 그날 저녁 나는 정말 파티에 가는 줄 알았다. 밤이 새도록 마당의 인기척을 기다리며 별들의 코러스 아래 비몽사몽 공주와 왈츠를 추었다.

 공주도 나를 좋아했음이 틀림없다. 나랑 헤어지기 싫어 아빠와 한바탕 싸웠기 때문이다.

“어떻게 눈사람을 실어가니? 가다가 다 녹을 건데….”

“공주를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어떻게든 데려가줘요!”

 그날 공주는 내 볼에 수없이 뽀뽀를 하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자동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내내 손을 흔들면서.

 그 후 나는 상사병을 얻었다.

겨울나라에서 가장 멋쟁이인 내가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시름 앓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나를 가엾이 여긴 동료들이 어느 날 겨울 요정을 모셔왔다.

“하율 공주님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공주는 봄 나라로 떠났는데? 넌 그 나라에선 살 수가 없어.”

“요정님은 뭐든 하실 수 있잖아요? 엉엉~”

 겨울 나라 백성의 행복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겨울요정은 마음이 따뜻하다. 생각 끝에 작전을 세워 주었다. 자신이 하율 공주만 한 초등생으로 분장해서 나를 데리고 다닐 거라고. 자신의 손끝을 벗어나면 금 새 녹아버리니 조심하라고.

“공주와 만나도 30초만 마주 할 수 있어. 그 이상은 곤란해. 우주의 질서가 망가지거든.”     

 

## 봄 나라와 여름 나라     


  겨울 봄 양쪽 나라 통행권이 있는 꽃샘바람을 타고 국경이동이 까다로운 봄 나라에 도착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아뿔싸 이미 하율 공주는 그곳에 없었다. 여름나라로 떠났다고 한다. 최대한 빨리 봄 나라를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는 이상한 존재가 되어 모두가 거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급기야  따스한 봄 분위기를 헤친다며 체포 명령이 내려졌다. 몰래 다녀야 했는데 모두들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아, 숨을 데도 없었다. 다시 고향으로 가야 하나? 목련 꽃 아래서 뚝뚝 눈물을 흘리며 신세타령을 했다.

 “어흑~ 하율 공주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가야 한다니. 요정님 어떻게든 좀 해봐요!”

 요정님에게 투정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울 요정은 이곳에선 힘이 없어요. 우리가 도와줄게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우아한 목련이었다. 같은 하양 족속이라 연민을 느꼈나 보다. 흰 봄꽃들이 회의를 열고 커다란 꽃잎파리로 가려주며 움직임을 돕기로 했다. 목련, 엷은 벚꽃, 모란이 차례로 바통 터치를 하고 마지막으로 하얀 유월의 장미에게 우리를 넘겼다. 여름나라로 갈 수 있는 장미 덩굴 속에 숨어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그 나라에서는 어린이들이 문제였다. 깔깔거리며 우리를 따라다녔다.

“뭐야? 한여름에 웬 눈사람이야? 장난감 인형인가?”

 옳다 됐다. 어린이들의 외침에 힌트를 얻어 요정은 하양 털을 어디서 구해왔다. 나에게 꼼꼼히 씌우고 흰 인형인 척 데리고 다녔다.

 묻고 물어 도착한 하율 공주님의 초등학교! 하지만 썰렁,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새 시간이 흘러 여름방학이 돼 버린 것이다. 공주는 안 보이지만 놀이터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하율 공주가 뛰놀던 장소라 그녀의 기운이 남아 있을 테니까. 한 장난꾸러기 녀석이 놀이 기구인 줄 알고 기어오르려 해서 혼났다. 요정이 나를 부둥켜안고 뛰어야 했다.

 수소문해서 하율 공주님 가족이 바캉스를 떠난 해변을 알아냈다. 아! 하필 바닷가라니. 내게는 최악의 장소인데…. 인형 모습이라도 애들이 얼마나 놀릴 것인가?     


## 30초의 사랑  

   

 하율 공주는 파라솔 아래 비스듬히 누워 여름날의 오수를 즐기고 있다. 이따금 음냐 음냐하며 가벼운 미소를 띤다. 이렇게 무덥고 햇볕이 쨍쨍한 여름나라가 좋다는 것일까? 이곳에서 행복하다는 뜻일까?

 “난 눈 내리는 겨울이 제일 좋아. 눈사람도 만들고~” 이렇게 노래 부르던 공주가 아니던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하염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공주가 잠이 깨서 우리가 눈을 마주치면 30초 밖에 시간이 없다. 그 후 내 몸은 녹아 증발해 버리고 내 영혼은 하늘나라로 떠날 것이다. 드디어 공주가 눈을 떴다. 처음엔 나를 못 알아본다. 꿈속 풍경인 것으로 생각하나 보다. 나랑 눈이 마주쳤다. 똑딱 똑딱 똑딱 똑딱 똑딱 5초 후.

“너 너, 그 눈사람 맞아?”

“난, 난….”

 30초 동안 할 이야기를 그렇게 곰곰이 생각해 두었건만,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시간이 지나버렸다. 요정은 내 손을 잡고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부드러운 공주의 목소리가 바닷바람 사이로 스쳐 왔다.

 “뭐야? 꿈이었어? 분명 그 눈사람이었는데! 내가 만든 그 나비 넥타이 매고서….”

 ‘굳바이~ 하율 공주님!’

 그래도 이제 원이 없다. 공주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에서 어떤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를 아직 잊지 않았다는.

 공주가족이 겨울방학 때 그 펜션에 다시 간다면. 하율 공주는 갈 때마다 틀림없이 나랑 똑같은 눈사람을 만들 것이다. 틀림없이. 나를 몹시 그리워하면서.     


-----

 

안신영 작가님 3월 16일 발행 글 <하율이 그림이 왔어요>를 보고 지은 댓글 동화입니다.

대문 사진은 작가님이 띄우신 하율이 그림을 제가 재 촬영한 것임.    

매거진의 이전글 둥가 둥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