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엽편, ACCIGRAPHY 작가님의 [전력질주]
Dear 빌헬름,
친구여, LA에서 어떻게 휴가를 보내고 있는지 궁금해했었지? 그 이야기도 들려줄 겸 다른 속사정도 말할 겸 펜을 들었네.
한마디로 본부는 너무 했다네. 26년 후반의 중대한 미션을 앞두고 꿀 같은 휴식을 취하라 하고선 긴급 미니 작전을 통보해 왔으니까. 일이 힘들었냐고? 아니. 그리 무겁지 않았어. 성공리에 마치기도 했고. 하지만...
며칠 전 내가 랭커심 거리에서 병오년 퍼포먼스를 구경할 때였어. Lankershim Lunar block party에서 춤추듯 글자를 쓰는 캘리그래퍼에게 매료되었지. 2026년이라는 글자가 힘차게 말이 달리는 모습으로 변신하는 그 순간. 치사하게도 직속상관 드니 빌뇌브에게 연락이 오지 뭔가. 그녀 신변을 철통 보호하라는 명령과 함께. 휴가 중 하루 정도 빌리는 것은 별로 미안하지 않다는 뉘앙스였어. 내 남은 일생을 내내 지배할 긴 여파가 올 줄은 모르고.
Accigraphy 팬인 영국 왕세자가 그 글씨 공연을 보기 위해 그녀를 초청할 예정이고. 2월 4일 그녀를 음해하려는 모 집단의 정보를 입수했다더군.
친구여, 요사이는 무의식에서도 작전을 벌인다네. 주인공의 무의식 세계를 파악하는 최신 무기가 개발되었거든. (단, 그것은 작전 중에만 가동)
늘 나의 미션 임파서블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자네를 위해 그날 오전의 일을 간략히 스케치해 봄세.
## 작전 1. 무의식의 세계에서 한판 붙다.
적들이 온 우주의 기운을 동원해서 그녀의 진을 빼고자 함. 빙판길에서 자동차가 360도 구르고. 처량하게 물에 빠진 모습의 미끼 괴물 등장. 인류애를 넘어서 온 우주 생명체를 향한 자애로움의 끝판 왕 주인공의 동정심 유발. 구해주자마자 다시 공격. 괴물을 맡아 싸우고 그녀는 물에 젖은 채 도망가게 함. 2월 4일 현실 일정을 위해 새벽 5시 자명종 스위치 턴 온. 무의식 상황 종료.
## 작전 2. L.A. 거리에서
오전 9시 행사 빌딩의 폭탄 테러 감지. 비버리힐즈 사옥으로 장소 변경. 주인공이 웨이모 (자율 주행 무인 택시)를 부르다. 택시 회사 상황 컴에 들어가 배치된 11호 점검. 2차 폭파 계획 확인. 사거리 중심에서 꼬리 물기 중인 택시 스톱시킴. 우리의 주인공, 사방의 경적에도 불구하고 씩씩. 역시 왕세자가 팬이 될 만함. 그녀가 다른 웨이모를 부름. 우리가 준비한 22호 배치. 5분 전 센츄리 시티 근처 신호등에 도착하면 행사 관계자로 분장한 내가 마무리 픽업 예정.
## 작전 3. 록스베리 공원 앞 신호등에서
주인공 태울 준비를 마치고 자동차에서 신호대기 중. 앗. 비상 상황 발생. 횡단보도에서 그녀가 뾰족구두를 벗어 들다. 길고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뛰기 시작하다니. 나도 차를 버리고 뒤따라 달리기 시작. 자갈과 딱딱한 흙이 붙어 있는 길인데 대단한 속력이다. 들려오는 무의식의 혼자 말들.
“펄펄” (눈도 안 오는데 웬?)
“나는 이렇게 살아 있구나!” (누구 때문에 살았는데?)
“죽인다” “미쳤다” “너무 좋다” (어떻게 내 마음까지?)
“황홀해. 오늘 이것으로 충만. 집에 가자.”
(아뿔싸! 엔도르핀이 너무 많이 분비되었군. 분별심 퍼부어 주자.)
“아냐. 먹고살아야 한다.” (휴~)
## 작전 4. 20세기 폭스 사옥에서
마지막까지 찰떡 수비다. 1분 전 엘리베이터 안. 악! 발에 묻은 흙을 내 구두 위에 툴툴 털다니. 화는 안 나고 귀엽기만 하다.
10시, 그녀의 개회사 환영 멘트. 나는 아직 헐떡이는데, 그렇게나 고른 호흡이라니. 내 휘하 M16 신입으로 뽑아도 손색없겠다. 혹시 캘리그래퍼는 그녀의 부캐? 아차, 혹 그녀는 적국의 스파이? 아무리 서로 총을 겨누는 상대편 요원일지라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언제부터 이 마음이었을까? 나보다 더 빠르게 춤추듯 달리는 모습에서? 횡단보도 혹은 사거리에서? 아니다. 그 랭커심 거리에서, 뒷걸음치며 붓을 휘두르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다. 나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친구여 나의 주인공에 대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적국 스파이 보다도 더 청천벽력이었네. 분명 20대 아가씨였건만 40 넘은 유부녀였다니. 뒷조사도 안 하고 사랑에 빠졌다고? 등잔밑이 어둡다고?
여보게, 자네 같은 T형이야 그러겠지. 아무리 T형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미리 계산하고 사랑에 빠진단 말인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쯧쯧하며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군.
너무 그러지 말게. 나도 인간일세. 007이라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켜가라는 법은 없잖은가? 그리고 사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아니겠나?
런던에서 자네와의 한잔을 손꼽아 기다리며.
Sincerely,
제임스 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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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igraphy 작가님 2월 4일 발행 글 [전력질주]를 읽고 써 본 픽션입니다. 많은 단어와 문장들을 그곳에서 빌렸습니다.
https://brunch.co.kr/@acci-graphy/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