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질주

无妄

by ACCIGRAPHY

음...

요즘은 신기한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어제는 좀 많이 재밌는 일이 있었고, 마침 몸에 여력이 있어 일기장을 펼쳐봅니다.


저는 1월을 바쁘게 지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올해는 좀 이래도 되나 싶게 휘몰아치는 일정이라 실수하지 않으려고 매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이렇게 사니까 또 다른 면에서 재밌기도 하고요.


그래서 어제로 다시 돌아가자면 일단 뒤숭숭한 꿈을 꾸고 일어났어요. 오전 10시로 잡힌 행사에 도저히 참석할 수 없도록 온 우주가 방해하는 꿈이었죠.


행사장 가는 길에 빙판길 운전을 하다 구르질 않나, 물에 빠진 괴물 구해줬더니 그놈이 나를 공격하질 않나, 억지로 빠져나와 물에 다 젖은 몸으로 목적지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눈을 뜨니 새벽 5시.


'오늘 쉽지 않겠군.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시간 전에는 도착해야겠어.'


침실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눈을 꿈뻑이다 벌떡 일어납니다. 세수하고 커피 내리고 몽롱한 정신에 행사 진행 스크립트를 한번 읽어보고 화장하고 일찍 나섰어요.


9시 무렵, 순조로운 상태로 행사장에 무사히 도착할 것 같습니다. 꿈은 꿈일 뿐, 슬슬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문자가 하나 도착합니다.


'보안 문제로 행사장이 바뀌었습니다. 베벌리힐즈 사옥으로 오십시오.'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며 사방에서 일제히 경적이 울립니다. 제가 타고 있던 웨이모(waymo, LA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율주행 무인택시)가 교차로에서 꼬리물기를 하다가 어정쩡한 스팟에 서 버린 것이죠. 경적 소리와 암울한 문자의 조합. 올 게 왔구나 싶었습니다.


교통 체증으로 악명 높은 LA, 그것도 아침 출근 시간대에 헐리우드 동쪽에서 베벌리힐즈까지 갈 수 있을까 염려할 틈도 없이 또 다른 웨이모를 부릅니다. 다행히 빨리 와 줬으나 도착예정시간이 9:55.


웨이모의 단점은 정확히 내가 원하는 곳에서 하차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원하는 하차 지점에서 무려 3분이나 걸어야 하는 곳에 웨이모는 나를 떨구었고, 그때부터 아드레날린이 폭발하기 시작했으나 뾰족구두와 화려한 의상으로 인해 신속한 이동이 불가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신호등을 건너는데 심장은 시속 120km, 뾰족구두발은 시속 2km로 속에 천불이 난다는 게 어떤 상태인지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었고, 저의 천불은 건널목을 반 정도 건넌 지점에서 특이점에 도달해 버렸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 구두가 들려 있었고, 공원 하나를 가로지르며 미친 사람처럼 전력질주를 하고 있더라고요.


공원의 흙바닥은 맨발 걷기 하기 최악인 자잘한 자갈과 단단한 흙이 결합된 형태였으나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드디어 심장과 발바닥의 속도가 맞아떨어졌거든요. 천불이 사르르 녹아들면서 주변 풍경에 슬로우가 걸리며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어요. 생뚱맞게도 살아있어 너무 행복하다는 느낌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우.와.아.아.아.세.에.에.에.상.에.나.는.이.렇.게.펄.펄.살.아.있.구.나.아.아.아...!!! 오.늘.날.씨.죽.인.다.아.아.아.아...!!! 미.쳤.다.너.무.좋.다.아.아.아…!!!


점묘법으로 그림을 그리던 작가들이 왜 그렇게 그렸는지 알 것만 같았어요. 하나의 소리 안에 들어있는 무수하게 춤추는 점들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에리카 바두가 내는 쪼개진 소리랑도 비슷했습니다.


황홀했습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행사를 잘 해내는 게 아니었던거죠. 지금 이 순간 이런 방식으로 현존을 느껴버렸으니 그만 집에 가도 될 판이었습니다. 그치만 나는 이미 세상에 태어났고, 없지 않고, 있는 존재입니다. 부러라도 분별심을 작동해서 먹고살아야 됩니다.


본의 아니게 신이 나버린 상태로 10시 정각에 건물 도착. 회의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발에 묻은 흙을 툴툴 털고 구두를 신고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당당하게 행사장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환영멘트를 시작하는데, 전력질주 한 사람치고는 호흡이 꽤나 안정되어 있어 이것도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행사’라는 이름의 보너스 게임까지 끝내고 집에 오는 길에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요. 베벌리힐즈 대로 건널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량 운전자가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심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여자가 갑자기 자기 차 앞에서 구두를 벗더니 맨발로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도대체 그 여자가 왜 그랬을까?


그분이 소설가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를 이용해서 뭐라도 한 꼭지 쓰시면 조금이나마 해소되실 수 있으니까요. 평소 호기심이 왕성하고 집요하며 진실만을 알고자 하는 분이었다면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를.




*많이 늦었지만 병오년 퍼포먼스 인트로만 올려봅니다. 불성실한 포스팅에도 제 작업을 궁금해해 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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