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는 흰 바지를 입는다?
흰 바지 패션의 국어 선생님
오늘 아침 흰 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하얀색 폴로 티에 아이보리 색 진주 목걸이(진짜인지 가짜인지 나도 모름), 블라우스 촉감의 검은 재킷에 아쉬 운동화를 신었다. 하필 여름날씨가 한풀 꺾여 아침저녁으로 서늘하고 우중충한 날 흰 바지를 입었다고? 나도 안다. 오늘은 흰 바지 입기에 영 어울리지 않은 날이라는 것을.
패션에 별 관심 없고 공들여 옷을 갖추어 입지 못하지만 흰 바지가 멋스럽다는 것은 알고 있다. 특히 한여름 햇볕이 쨍쨍 내리쬘 때 강렬한 태양과 어울리는 것 같다. 위에 어떤 색깔을 입어도 소화하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튀는 것 같아서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나이 들어 용감해져서 초여름에 하얀색 바지를 하나 장만했다. 하지만 사놓기만 하고 여름 내내 용기를 못 내었다. 어제 불현듯 생각이 나서 가을이 오기 전 한번 입을 결심을 했는데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이다.
내 나름의 파격 패션을 직장에서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자신의 숙제를 한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싱거운 마음으로 바지를 접는 중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고교 시절 흰 바지 패션의 주인공, 국어 선생님.
선생님의 흰 바지가 그토록 멋스러웠던 것은 롱다리에 허리가 가늘었기 때문이다. 상의도 종종 원색에 가까운 셔츠였던 것 같다. 어렵게 살던 시절 그런 패션은 보기 드물었다. 미술이나 음악 선생님도 아닌 분이. 바지 패션뿐 아니라 춤추는 듯 한 걸음걸이와 비음 섞인 말투도 우리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선생님은 강의 제스처도 연출하는 듯했는데 이과 반이었던 내게 국어는 어렵고 고리타분하기만 했다. 그래서 지금 이토록 글쓰기에 고전(苦戰)하고 있을 터이다. 국어 시간이면 선생님의 세련됨과 딱딱한 교과목의 불협화음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25주년 재상봉 때 국어 선생님은 몇몇 초빙된 선생님들 가운데 계셨다. 여전히 롱다리의 흰 바지 패션으로. 우리 모두는 다시 한번 선생님의 흰 바지에 열광하며 여고 시절로 시간 여행을 했다. 그날은 선생님의 주름진 얼굴과 흰 바지가 또 언밸런스여서 미묘한 여운을 주었다.
오늘 저녁 흰 바지의 국어 선생님이 떠오른 것은 순전히 패션 때문이었지만, 생각은 흰 바지 보다 국어 쪽에 더 머무른다. 브런치 작가가 되어 이제 국어가 궁(窮) 한 것이다. 멋진 흰 바지 패션의 선생님이 고문(古文), 근대문학 등을 강의할 때, 더 집중할 걸 더 마음 쏟을 걸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