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노래하는 3차원의 교향곡

morgen 작가님의『삶의 미술관』

by 램즈이어

한나절 정도 혼자서 미술관에서 뒹구는 것을 좋아한다. 화폭을 벗 삼아 거닐며 예술가의 혼을 만나고 한가로이 몽상에 젖는 일. 하지만 여러 가지 현실의 과제 때문에 이런 행복한 시간은 일 년에 몇 번 갖을까 말까다.

이번에『삶의 미술관』을 읽으면서 직접 가지 않고도 그런 경험을 했다. 그림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묵상은 더 깊고 풍요로웠다. 그것은 이 책의 독특한 구성이 한몫한 것도 있다. 보통의 인문교양 지식에다, 회화에 얽힌 저자의 경험과 사유(수필)가 함께 실려 있기 때문이다. 주옥같은 그림설명에 이어지는 저자 자신의 옛이야기를 물 흐르듯 따라가기도 하고, 문득 ‘나는’ 하고 시작되는 일인칭 시점에 정신을 차리고 조바꿈한 멜로디를 맛보기도 했다.

명화를 통해, 태어나서 사랑받고 놀며, 공부하며 꿈을 꾸고,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며, 인생을 알아가고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 늙어 생을 마감하는 시간을* 펼쳐 보였다. 그림과 그에 따른 인간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1, 2차원을 이루고, 어렴풋한 작가의 자전적 스토리가 3차원의 골격이 된다.


헤르만 헤세와 전혜린의 발자취를 따라 슈바빙을 걸으며 나도 대단한 문학가가 될 것만 같았다.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을 걸으며 철학 바람을 듬뿍 쐬고 ‘개똥철학자’가 되어 한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진짜 철학자가 될 뻔했다. --- 오늘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보며, 넋 놓고 쳐다보며 또 정신이 혼미해진다. “아, 나는 철학을 공부했어야 해, 철학자가 됐어야 해” (p76) *


요런 대목에서는 작가의 과거 이국 생활이 엿보여 부러웠다. 학문에 대한 열정과 유머에 빙긋 입이 벌어지고, 평소 철학 관련 책들과 사상을 -내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손 안에서 그토록 쉽게 다루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림 소개 다음으로는 ‘작가 알기’, ‘미술사 엿보기’ 챕터가 이어지며 미술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돕는다. 지식이 짧은 내게 미술사조, 운동에 대한 격조 높은 상식을 전해 주었다. 특히 미술사를 차근차근 짚어 주어서,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의 근대 이후 요약과 최신 추가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많이 좋아하는 화가들이 등장할 때는 무척 반가웠다. 베르트 모리조,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앙리 루소, 에드바르 뭉크 등. 책은 늘 추억과의 가교 역할을 해 준다. 덕분에 모리조와 페르메이르, 뭉크의 작품을 실물 영접했던 미술관으로 시간 여행도 잘 다녀왔다.



새롭게 알게 된 멋진 화가들이 있다. 독일 표현주의 작가 아우구스트 마케의 <숲길 위의 커플>, 영국 로렌스 알마타데마 경의 <더 이상 묻지 말아요>를 보며 강렬한 색채에 매료되었다. 특히 알마타데마 경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이야기를 캔버스에 환상적으로 풀어놓아서 그의 작품 세계와 작업방식을 더 찾아보기도 했다.

<장례식 교향곡> 시리즈를 그린 리투아니아 화가 미칼로유스 콘스탄티나스 치우를리우스도 처음 알았다. 화가, 작곡가, 작가로서 색상과 음악을 동시에 인식하고 음악의 원리를 회화에 적용했다니!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 열차>를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주인공들이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화폭에서 스카우트되어 온 것 같고 그림의 전체적인 톤도 흡사해서다. 이 작품과 화가를 바라보는 저자의 마음이 감명 깊게 다가왔다.


타인의 불행으로 아픈 내 마음, 손 내밀어 쓰러져가는 사람을 잡아주는 내 손, 그것이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이기심인지, 진정으로 타인을 위해서 행하는 이타심인지 깊이 생각해 본다. ---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 열차>를 바라보는 당시 파리의 부르주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아니, 그보다 나의 이 마음은 무엇인지… (236p)*


미술관 기행과 더불어 수필집 한 권을 읽은 기분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런 부담 주지 않고 잔잔하고 편안하게 들려주었으나, 삶과 죽음에 대한 morgen 님의 태도를 본받고 싶었다.

『삶의 미술관』에서 소개한 명화들을 보면서 회화에서도 기획과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쓰기와 어쩜 그리 유사한지. 밀레의 작품 <첫걸음>이나 고흐가 모사한 <첫걸음, 밀레 이후>가 사랑받는 것은 그 스토리와 기획이 우수해서일 것이다. (두 사람 각각이 자신만의 화풍을 드러냄과 동시에.) 이 책의 마지막에 소개된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나?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도 제목과 화면의 기획 때문에 주목받지 않나 싶다. (거의 유작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글쓰기 영역에서도 필력과 문체를 갖춘 작가님들이 좋은 구상을 하게 되면 쉽게 출간으로 이어지는 것을 본다. 두둑한 직접 간접 경험의 보따리에서 이러저러 창의적인 기획을 하시니 와하며 탄성이 나온다.

작가님은 이 책을 낙선전에 비유했다. 몇 년 전 브런치 대상 공모에 응모했으나 선발되지 않았고 그 후 출간 제의를 받아 탄생했다고 한다. 마네가 1863년 파리의 낙선전에서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선보이며, 역사의 한 획을 긋고 데뷔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낙선전에서 오히려 더 훌륭한 작품들이 태어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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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혜숙,『삶의 미술관』그림으로 만나는 생의 모든 순간, J&jj , 2022


중간의 그림 사진:

베르트 모리조 <부지발에서 딸과 함께 있는 외젠 마네> 1881,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의 특별 전시 photo by Lambs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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