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과의 대화, 『열하일기』를 읽고
어떤 자그마한 단서가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위대한 문학 작품에서나 범인을 좇는 수사 현장에서나 전쟁의 승패에 있어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과 홍차 에피소드다. 그 도구들을 매개로 순식간에 시간 여행하듯 어린 시절의 방으로 옮아간다. 최근에는 글벗님 글에서 비슷한 구절을 읽었다. (외부적인 단서가 적혀있지는 않으나) 타향살이 집 대문 우체통의 나무 틈새를 통과하는 바람소리가 갑자기 생생히 기억났다는.
야생 백두산 호랑이 어미가 새끼 다섯 마리와 함께 거니는 기사를 보았다. 지난달 중국 북동부 지린성 훈춘시 동북호랑이표범 국립공원의 카메라에 야생 호랑이 6마리가 포착된 것이다. 성체 암컷 호랑이의 나이는 약 9세, 새끼 5마리는 생후 약 6~8개월로 추정된다고 한다.
배경의 풀 섶과 나무들이 파스텔 톤이어서 처음에는 그림인 줄 알았다. 얼마나 멋진 호랑이 가족이던지! 걸음걸이에는 여유와 엄위함이 배었고, 가죽의 빛깔은 찬란하면서도 편안하다. 새끼들까지 그리 위엄이 있다. 깊은 산속 최고 우두머리 동물의 왕자가 내뿜는 품위일 것이다.
이 모습 때문에 나는 문득 호랑이에 대한 그리움에 빠지고, 연암 박지원이 그의『열하일기』에서 호랑이에 대해 적었던 대목이 생각나고, 독후감을 다시 들춰보았다.
3년 전 독서 모임에서 연암선생을 <별에서 온 그대>처럼 21세기 서울로 모셔온 적이 있다. 여기저기 구경시켜 드리며 나눈 대화를 글로 적었었다.
## 안암골에 호랑이가 왜 그리 많냐고요?
아! 선생님은 안암골 대학가를 지나치며 젊은이들이 ‘안암골 호랑이’, ‘천하무적 호랑이’ 하며 수군대는 것을 듣고 이렇게 물으실 게 빤하니 참으로 난감한 실정입니다.
사실은 저도『열하일기』를 읽고서야 비로소 호랑이가 실감 나고 호랑이에 대한 그리움이 되살아났습니다. 아비 없이 자란 자식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모르고 갈급함도 없이 자라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아버지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있는 친구를 만나서 처음으로 아버지 없음을 직시하고 애타게 슬퍼하는 것처럼요.
사신단은 여정 중에 얼마나 자주 호랑이의 위험에 처했던지! 밤에 그 울음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겹겹이 방비 태세를 세우며 무서워했습니다.
즉시 구련성으로 향했다. 무성한 푸른 숲에는 장막이 둘러 있고 호랑이를 막는 그물이 사방에 쳐졌다. --- 군뢰들이 뿔피리를 한 번씩 불면 300여 명이 일제히 소리를 냅다 질러댔다. 호랑이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경비하는 것으로 밤이 샐 때까지 그렇게 했다. (6월 24일)
선생님은 공포 분위기를 서술했지만 저는 부러움 가득 읽었습니다. 지금 저희에게, 호랑이는 마치 먼먼 옛적 중생대의 공룡처럼 돼 버렸습니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때 우리 자녀, 손주들은 호랑이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용처럼 전설의 동물로 느낍니다. 우는 아기에게 써먹었다는 “호랑이 온다! 뚝!” 이런 협박도 자취를 감추었지요.
그것이 안타까워 서울 랜드 동물원에 데리고 가 호랑이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용맹은커녕 처량한 모습의 호랑이올시다. 먼데를 응시하고 있는 저만치 우리 안의 호랑이를 보고 아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림에서만 보던 것을 실물 영접했다는 정도의 의의가 있었지요. 대학교 심벌, 올림픽 마스코트로 겨우 그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민화 속의 호랑이가 <케데헌> 때문에 사랑받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아이들에게 스토리텔링 속의 주인공으로 더 다가오네요.
선생님의 <호질(虎叱)>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똥구덩이에 빠진 북곽 선생을 향한 호랑이의 꾸짖음은 얼마나 시원하고 엄하던지요. 그러한 질타를 부러워하다가 곰곰 생각하니 오늘날의 호질(虎叱)은 호랑이의 침묵과 부재, 그 자체가 호질(虎叱)인 것 같습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깊은 곳에서 이런 푯말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호랑이가 나오니 들어가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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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I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돌베개 출판사 2009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2025/12/29/UJVVGQ7IMZFQBOGDDMKBEJ6L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