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선생과의 대화
선생님, [허생전]을 읽으면서 늘 걱정되는 부분이 있는데요. 요즈음 같으면 표절 시비에 휩싸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뒷부분이 [홍길동전]과 비슷해서요. 홍길동이 이상향을 실현하는 율도국을 만든 것과 허생이 뜻을 펼치기 위해 무인도에 나라를 세운 이야기가 퍽 흡사합니다.
## 오늘은 안암골 아파트 단지로 모십니다.
겉으론 평범한 산 밑 아파트지만 여기가 ‘21세기 허생’으로 소문난 사람이 얼마 전까지 살았던 곳입니다. 요즈음 남산골은 아무리 허름해도 비싼 동네라 서민들의 주거지는 못되거든요. 이름은 비밀에 부쳐졌는데 그는 초등 시절부터 허생전을 읽으며 '허생 키즈'로 자랐다고 합니다. 집이 전혀 가난해 보이지 않는다고요? 그렇습니다. 그 댁은 우리가 보기에도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쪼들리지 않고 가끔 국내외 여행도 하는 서울의 중산층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이 심히 가난한 것은 극심한 상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 허덕인 사람은 그의 아내지요. 그녀는 20년 전부터 강북의 이 아파트를 팔고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날이면 날마다 남편을 졸랐답니다. 21세기 허생은 독서에만 매진하며 꿈쩍도 안 했지요. 몇 해 전 일련의 부동산 법 개정 후 아내가 심하게 부부싸움을 걸어오자 마침내 책을 던지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장사라도 못하냐?" “도둑질이라도 못해?" 하며 바가지 긁었냐고요? 아닙니다.
“이제 강남에 영원히 갈 수 없게 되었다. 나이 오십이 다 되도록 똘똘한 아파트 한 채 없다. 산 아래 강북의 한 푼 오르지 않은 아파트로(사실은 좀 올랐건만) 어떻게 노후 준비를 할 거냐? 풍광이 고즈넉해서 떠날 수 없었다면 그동안 왜 베스트셀러 한 권 써내지 못했느냐?” 고 했습니다.
그는 집을 나간 지 일 년 만에 거부(巨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바람처럼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는 사지 않고, 상호신용금고를 차렸다고 합니다. 그는 영끌족의 주택부금을 저리(低利)로 대체해 주고, 가난해서 아내를 못 얻는 장정에게 직장과 결혼비용을 대주고 있습니다. 옛 허생은 몇 천 명 되는 도적떼들을 수발하며 일을 주고 아내도 마련해 주었죠.
21세기 허생은 서울의 대책 없는 젊은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어떤 일자리냐고요? 일종의 게임 회사입니다. 밀레니엄 허생이 머리가 좋으니 첨단 게임 만드는 스타트업을 차렸냐고요? 아닙니다. 그저 청년들이 마음껏 게임만 하는 회사입니다.
출근해서 <리그 오브 레전드>나 <배틀그라운드>만 하면 됩니다. 튼실하게 월급이 나오기 때문에 그들은 난생처음 하루를 시작하는 커피 향과 함께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하게 게임을 했습니다. 구내식당에서 덕후 동료들과 함께 하는 점심은 꿀맛이었고요.
직원들의 장래는 자연스럽게 두 갈래로 나뉜다고 합니다. 계속 게임을 열심히 해서 손이 무척 빨라진 그룹. 그들은 AI 전쟁 연구소의 자문위원으로 갑니다. 요사이는 컴퓨터 화면의 전쟁 시대라. 이네들이 어려서부터 쌓은 SF 왕국에서의 활약과 노하우는 국방부에서 요긴한 전략 자산이 되었습니다.
다른 그룹은 게임이 지겨워져서 제발 게임 안 하게 해 달라, 이제 몸 좀 쓰게 해달라고 조르는 이들입니다. 그 청년들은 매일 체력 훈련을 해서 보디가드 등으로 채용됩니다.
매점매석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그가 어떻게 돈을 벌어 자본을 만들었냐고요? 소문에 의하면 [허생전]의 허생만큼이나 영리한 그는 일찌감치 비트코인 버금가는 암호 화폐를 만들어 두었었답니다.
약 200년 전, 허생이 “돈 만 냥으로 나라 경제가 흔들려서야 되겠냐?” 했지요.
21세기 허생은 남산 타워가 바라보이는 CEO 방에서 탄식합니다.
“겨우 동전 만개로 나라 코스피가 등락해서야 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