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선생과의 대화
보수적인 사람과만 부대꼈던 제게 가장이 음식을 만들어 식구들에게 접대하는 풍경은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놀랍고도 신비로운 풍경으로서. 어느 글벗님이 밤늦은 귀가 후 남편이 준비한 전골 이야기를 했을 때 얼마나 부러웠던지요. 그 남자는 한없이 매력적이고 그 음식은 맛이 특별할 거 같았습니다. 구독하는 인기 작가님이 아빠로서 손수 요리하는 글도 남다르게 다가와, 마음 같아서는 라이킷을 여러 개 달고 싶었지요.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분이 요리 에피소드까지 나누면 게임 끝입니다. 지휘자 정명훈이 여러 해 전, 남프랑스 프로방스에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로 프랑스 식단을 마련한다는 일상을 슬쩍 내비친 적이 있습니다. 공해 속의 가엾은 야채를 사다가 날마다 남편을 위해 저녁 준비를 하는 서울의 아내들에게? 그가 동화 속 미지의 왕자님이 되던 순간이었습니다. 어느 교향악 클라이맥스를 휘젓던 때보다도 더 멋져 보였지요.
그런데 최근에 선생님이 손수 장을 담갔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세상에, 조선의 대문장가, 석학께서... 아내와도 사별하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연암 서간문을 번역한 박희병 교수의 책에서 당신이 직접 담근 고추장을 아들에게 보내는 내용을 발견한 거죠.
고추장 작은 단지를 하나 보내니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게다. 내가 손수 담근 건데 아직 푹 익지는 않았다. (p26)
고추장은 내손으로 담근 것이다.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주면 앞으로 계속 ---(p35) #
그 고추장이 궁금한 것은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제가 장을 담글지 몰라 얻어먹는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고추장 못 담그는 아낙네도 있단 말인가?”
선생님은 놀라시겠지만, 저는 별로 부끄럽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그런 주부들이 많고 시중에 판매하는 고추장도 많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고추장을 직접 담글 줄 모르기 때문에 더욱 홈메이드 맛을 사모한답니다. 친정어머니, 시어머니를 거쳐 친정언니의 작품을 맛보고 있고, 최근에는 어느 80대 지인의 것도 선물 받았습니다. 황송하고 염치없게도.
뻔뻔한 김에 선생님 솜씨도 갈망해 봅니다.
어떤 의구심이 없지는 않습니다.
메주 가루와 엿기름과 찹쌀가루를 섞어 달이는 것은 아무래도 하인을 시켰겠지요? (물론 그 비율은 지시하셨을 테고요.) 고춧가루를 투하할 때는 적당 양을 직접 결정하고, 덩어리 지지 않게 충분히 젓는 것은 아랫사람이 했을 겁니다. 천일염 간은 당근 손수 하시고. 햇볕 잘 드는 곳에 3-6개월 숙성시킬 때, 때때로 나와 열어 보았을 테니 선생님의 손길, 눈길, 정성이 담긴 것은 틀림없겠죠?
다시금 황송하고 염치없게도, 선생님께 부탁드려 봅니다.
타임머신 타시기 전에 손수 만드신 고추장 한 종지만 좀 챙겨 주십사.
선생님이 아드님에게 보낼 때는 맛이 있을지 없을지 걱정했지만 (호탕함은 간데없고 조바심이 엿보이니 얼마나 귀여우신지요.) 저희에게는 그런 걱정 눈곱만큼도 필요 없습니다. 그 고추장이 21세기 서울에 오면 우선 철저한 보안을 해야겠지요. 누군가 훔쳐서 고가 경매에 부칠 꿍꿍이를 할지 모르니까요. 잘 간직했다가 저의 독서 모임 간식 타임에 내놓겠습니다.『열하일기』를 끝내고 맛보는 선생님의 고추장은 얼마나 기가 막힐까요?
메움과 감동에 눈물 흘리며 빨강이 묻은 오징어를 씹을 것입니다. 아니, 차마 못 먹고 그 종지를 바라만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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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추장 단지를 보내니』 박지원 지음 박희병 옮김, 돌베개,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