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사또를 아십니까? (1)

사또服을 입은 연암

by 램즈이어

요즘은 [신데렐라] [백설공주] 등의 고전들이 페미니즘 시각에서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조금 다른 결이지만 나도 우리의 [춘향전]에서 최근에 못 마땅한 점을 한 가지 발견했다. 사또의 이미지를 크게 훼손시킨 것. 이번에 고전을 읽다가 내가 그동안 갖고 있던 이미지와 정 반대의 사또를 만났다. 픽션 속의 변 사또와 멀고도 먼 대척점에 있는 논픽션의 박 사또다. 그가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백의종군의 평행 이론


연암 박지원은 55세의 나이로 1791년 안의(지금의 경남 함양군 안의면) 현감으로 부임했다. 50세가 넘어서 얻은 선공감 감역에 이은 군수보다 낮은 관직이다. 아드님도 [과정록]에서 아버지가 가난 때문에 말단 공직을 맡았다고 했는데 연암의 스케일을 생각할 때 영 어울리지 않는다.

괴테처럼 황태자의 친구로 어울리다가 나중에 재상까지 되어야 마땅할 것 같고, 황희 정승쯤 의 감투를 얻었어야 할 것 같다.

이십 대에는 과거 시험이 그를 감당할 수 없었고, 30대에는 홍국영의 칼날을 피해 연암 골로 피신해야 했으며, 40 중반에는 열하 여행과 집필로 진득한 공직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나이도 많고 몹시 작은 고을이었으나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 등 해당 지역의 생사여탈권을 맡아 재치 있고 공의롭게 다스렸다.

무엇보다도 이곳에서 자신의 북학 이론인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실천하였다. 이 부분에서 이순신의 백의종군이 오버랩된다. 청나라에서 배운 물레방아, 베틀 제작, 벽돌 사용법 등을 최초로 가르쳐 백성들을 크게 유익하게 했건만, 그때 전국에 파급되거나 후손에게 이어지지 못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고 장계에서 장군이 언급한 금쪽같은 배와 비견할 수 있건만. 부국강병(富國强兵)에서 부국으로 나라를 이롭게 하려고 열심을 내었건만.


## 좋은 시절을 만들어 낸 사또


[과정록]에서 보면 안의현의 박 사또는 민중에게나 선비들에게나 다시는 맛보지 못할 그리운 시절을 안겨 주었다.

30여 년 후 걸인 노파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다만 새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늘, ‘예전의 박 사또 같기야 하겠어?’라고들 말하더이다. 그리고 백성들 간에 돈을 갹출하여 술 마시고 놀 때면 언제나 박 사또 이야기를 하면서, ‘그분은 풍채가 훌륭하고 풍류를 좋아하셨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듯하면서도 위엄이 있고 인자하셨지. 그 때문에 관아와 고을이 모두 한가하며 요족하여 저절로 즐거웠지. 그처럼 좋은 시절은 다시 볼 수 없을 게야!’라고들 말합디다.” *


지계공(처남 이재성)이 어떤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안의현에 도착해 40일 동안 하풍죽로당에 거처했다오. 그곳에는 예스러운 거문고와 운치 있는 술동이, 잘 정돈된 책들과 아담한 칼들이 비치되어 있었다오. 술이 거나해지면 천고의 문장에 대해 마음껏 토론했으니, 당시의 즐거움은 1백 년의 인생과 맞바꿀 만했다오" *


## 박 사또와 수절(守節)


박 사또에게도 수절의 단어가 뒤 따라다닌다. 춘향전의 변 사또와는 정 반대의 의미로.

연암은 51세에 아내를 여의고 지극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20수 시(詩)를 지었으며 죽을 때까지 18년 세월을 독수공방 했다. 안의현 원님이면 안살림 일도 많으니 주변의 뭇 여성들이 가사와 잔심부름 등을 맡아했을 것이다. 가까이서 벼루나 먹 시중, 차나 수건, 빗을 받들거나 하는 등. 하지만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매양 술이 거나해지고 밤이 깊어 등잔불이 가물가물하면 담소는 한창 무르익고 앞자리의 기생들은 구성지게 노래를 불렀었지. 이 즈음 사람들은 바야흐로 신이 나고 흥이 고조되었는데, 공은 때때로 근엄한 낯빛에 엄숙한 목소리로 기생들을 그만 물러가게 하곤 했지. 그러면 사람들은 흥이 싹 식고 말았지. 그러나 공께서 왜 그러시는지는 알 수 없었어. 아마도 이는 공이 스스로를 힘써 반성하며 극기하는 방법이 아니었나 싶어. (114p)*


지계공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술잔치 할 때 질탕하게 풍류를 즐기면서도 마음을 다스리는 연암의 품성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희귀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 겸업 사또의 애로


박 사또는 본업 외에 글쓰기라는 또 다른 정체성이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의 마음속에서는 글쓰기가 되래 주업이었을 것이다.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하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장면은 브런치 작가에게 동지애를 불러일으킨다.


붓을 들고 종이를 펼쳐 바야흐로 그럴듯한 생각이 떠오를지라도 미처 한 글자도 쓰기 전에 창밖에서 형방(刑房)이 무릎을 꿇고 '하사오며' '뿐이옵고' '갓갓' 등의 소리를 내며 문서를 읽어 대고, 완악한 아이종은 짙은 먹에 붓을 적신 채 종이 귀퉁이를 비스듬히 잡고 서 있어, 얼른 수십 장 문서에다 서명을 한단다.

그러고 나서 물러나와 방금 전 흉중에 있던 아직 문자화하지 않은 한 편의 좋은 글을 생각해 보면 애석하게도 그 사이에 그만 저 만 길 높이의 지리산 밖에 걸려 있지 않겠니? 하지만 어쩌겠느냐, 어쩌겠어. (18-19) **


공무를 보는 중에도 불쑥불쑥 글쓰기 영감이 떠오르곤 했나 보다. 일치감치 N 잡러의 탄식을 늘어놓고 있으니, 이 일에 있어서도 시대를 앞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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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아버지 박지원』 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돌베개, 1998 <과정록>

** 『고추장 단지를 보내니』 박지원 지음 박희병 옮김, 돌베개, 2005 <연암 서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