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동화, morgen 작가님 [블루-깊이의 색, 거리의 색]
공주를 태운 범선은 모로코 셰프샤우엔 산속에 도착했다. 험준한 산맥사이로 등장하는 그곳의 파랑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빛깔이었다. 그 푸름은 둘레에 은은한 기운을 뻗치며 다채로운 풍경에 부드러움을 더했다. 산간 마을에서는 양치는 목동들 빼고 도통 사람 만나기가 어려웠는데, 톰보이 공주는 금세 그들과 어울리며 야생의 목자 일을 배웠다. 특히 섬세하고 약해 보이는 한 소년에게 튼튼한 공주가 큰 힘이 되었다.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다 급기야는 주객이 전도되어 공주가 염소와 양 떼를 돌보고 그가 소소한 일을 했다.
“천국을 꿈꾸어요.”
양무리들 곁에서 휴식할 때면 어린 목동은 종종 피리를 불었다. 그 소리는 깊고 따스하게 골짜기를 메아리치며 숨 쉬는 뭇 생명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공주는 대 자연 속에서 양치기 소녀로 지내는 일이 참 좋아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어느 날 미션 완수의 날이 며칠 남지 않음을 깨달았다. 친하게 지낸 소년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이 나라 왕자 만나는 방법을 상의하기로 했다.
“네가 공주란 말이지?”
“왜? 전혀 공주 같지 않아? 억세서?”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나도….”
당장 소년은 셰프샤우엔 촌장 댁을 향해 먼 거리를 달려갔다 돌아와서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다음 날 어르신이 손수 공주의 말을 준비하고 왕궁으로 인도할 거라면서.
분홍 공주는 그동안 정들었던 양들, 산과 언덕이 아쉬웠다. 뭇 색깔을 아우르는 이곳의 파랑을 한껏 마음에 담고 있는데, 목동은 피리도 본체만체 점점 말이 없어졌다. 그때 소년은 평소와는 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석양에 반사하는 파스텔 톤 초목 가운데서 순수하고 슬픈 낯빛을 하고.
다음날 아침 촌장과 나란히 말(馬)을 타고 걸으며 공주는 셰프샤우엔의 푸른빛을 한껏 칭찬해 주었다.
“빛깔로 치면 그 아이가 일등공신이에요.”
“무슨 말씀?”
“그 애가 온 후로 이곳의 색이 달라졌어요. 그전까지는 그저 평범하고 건조했죠.”
“산간 마을이 前에는 다른 빛이었다고요?”
“네. 이런 파스텔톤은 없었어요. 온 지 일 년이 채 안되는데. 부모를 잃고 도망쳐왔대요. 먼바다 건너.”
“동쪽에서 왔나 보군요.”
공주는 자신이 거쳐 갔던 여러 나라를 떠올려 보았다. 그 사이 수많은 세월이 흐른 것 같았다.
“아프가니스탄 왕자였나 봐요. 동방의 파랑나라, 청람 왕조의.”
소년이 여리 여리하고 염소들을 잘 다루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갑자기 공주는 그의 이름을 알아두지 못한 것이 미안했고 어떤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아이 이름은요?”
“아니 아직 이름도 모르셨어요? 울트라마린의.”
‘울트라마린 왕자. 셰프샤우엔의 파스텔톤을 만든 주인공. 아, 네가 바로….’
공주는 급히 고삐를 돌려 반대편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촌장에게 분홍 왕국이 망했다고 전해 들은 울트라마린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된 공주가 가여웠다. 어떻게 해서든 공주의 귀향을 막고 싶었다. 그녀에게 상처가 될까 봐 비밀로 하느라 두 사람은 날마다 싸울 수밖에 없었다.
“셰프샤우엔에서 그냥 살자”
“어서 떠나야 해.”
결국 마지막 6시간을 남기고 공주는 왕자를 포도주로 간신히 재워 업고서 범선에 올랐다.
‘분홍 왕국으로’
뿌듯하게 입력을 마친 공주는 무릎에 누인 소년을 바라보며 아버지 앞에서 자랑스러운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잠에서 깬 왕자가 분홍 왕국의 진실을 말해주자마자, 공주가 놀랄 새도 없이 범선은 지중해 상공에서 낙하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건지, 1년이 지나버려서인지, 종착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서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범선의 잔해를 붙잡고 점점 호흡이 다하면서 공주는 의문에 휩싸였다.
‘그럼 우리의 왕위 계승은? 그 왕국의 영광이 무궁할 거라고 했는데?’
범선이 만나게 해 준 여러 파랑 왕자들도 떠올랐다. 울트라마린의 손을 꼭 잡고 함께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어렴풋이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생을 마치는 이 해안이 바로 너희 왕국이다. 먼 훗날 누군가 이름을 짓기까지는 무명(無名)인 채로.”
옛날 옛적 호메로스는 지중해를 포도주빛 검은 바다라고 읊었다. 적당한 단어가 없었을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몰랐을까? 대문호에게 당최 어울리지 않는다. 혹시 그 시대에는 실제로 그 빛깔이지 않았을까?
분홍공주와 울트라마린의 혼이 지중해에 스며들었던 다음 날, 해변 사람들은 뭔가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바다 빛이 예전의 색채가 아닌 것이다. 더욱 밝고 영롱한 빛을 띠었다. 대낮의 해님은 새로운 파랑 심포니를 지휘하는 것만 같았다. 하루하루 다르게 찬란하고 마음 저미는 선율로. 울트라마린, 코발트블루, 쪽, I 이브 클랭이 혼자 혹은 함께 나타나고 가끔 보라 빛도 보였다. 아주 드물게 새벽녘, 어떤 사람은 바다에서 전혀 엉뚱한 색을 보았다고도 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분홍빛을.
19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어느 작가가 분홍 왕국을 계승한 새 나라를 “코트다쥐르”*라고 불렀다. 이름이 생긴 후로 이곳은 더욱 칭송이 자자해져 세계 각처에서 여행자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글을 짓고 스케치를 하며 자자 손손 걸작을 탄생시킨다. 코트다쥐르에서 바라보는 파랑이 영감을 퐁퐁 솟게 했다고 고백하면서.
만일 그 주인공이 분홍인 것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몇 세기 전 사라진 분홍 왕국의 공주가 모험 끝에 여러 파랑 왕자를 만나고, 마침내 짝을 찾았기 때문임을 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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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말 변호사이며 작가인 스테판 리에자르가 자신의 여행기에서 이 지중해 연안을 코트다쥐르(Côte d'Azur)로 처음 부르기 시작했다. 프랑스어로
코트(Côte): 해안 또는 연안
아쥐르(Azur): 천공의 푸른색
morgen 작가님 3월 11일 발행 글 [블루-깊이의 색, 거리의 색]을 읽고 적어 본 댓글 동화입니다. 주제와 표현의 많은 부분을 그곳에서 빌렸습니다.
https://brunch.co.kr/@erding89/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