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동화, morgen 작가님 [블루-깊이의 색, 거리의 색]
분홍 공주를 발견한 조드푸르의 브라만 사제는 모든 사정을 알아채고 왕자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이튿날 공주는 ‘라오 조다’라는 일급 전사의 호위를 받으며 코끼리 가마를 타고 소개팅 장소 메헤랑가르 성채로 올라갔다. 높은 언덕 아래 펼쳐지는 푸른 집들의 물결은 파란 바다를 보는 듯 시원했다. 왕자는 거인의 풍채로 원색의 파랑을 내뿜으며 호탕하게 손을 내밀었다.
“코발트블루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분홍이에요.”
악동들과 자주 어울렸던 말괄량이 공주는 투박하며 차가운 성격의 왕자와도 대화가 잘 통했다. 두 사람은 재미나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왕자는 공주의 재치와 지금껏 보지 못한 분홍빛에 빠져 버렸다. 공주는 왕자의 등 뒤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붉은 노을이 푸른 도시 위로 내려앉는 모습은 수평선으로 떨어질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공주의 표정은 자아도취적인 왕자에게 조금 엉뚱한 암시를 주었다.
“내일 저희 아버지를 만나보시겠습니까?”
다음 날 분홍 공주는 왕을 알현했다. 촛불 하나만 켜도 방 전체가 별처럼 빛나는 거울궁전과 동방의 화초들로 가득한 꽃 궁전을 지나서 보석들이 가득한 진주 궁전에서.
왕에게는 이웃나라 공주로 이미 점지해 둔 예비 며느리가 있었다. 분홍 공주로서는 궁전 초대에 응한 것이 순전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메헤랑가르 성채에서 펼쳐진 외부 풍광만큼이나 내부 장식도 훌륭한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
경직된 계급사회에서 융통성이라고는 배워 보지 못한 왕자는 이 상황에 어쩔 줄 몰랐다. 공주도 나름 고민스러웠다. 불투명하고 은폐력을 품은 듯 다소 음습한 왕도 싫었지만, 사실 왕자도 자신의 배필감이 아님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만 왕자의 단순한 성품이 어디로 튈지 몰라서 그대로 말하기가 두려웠다.
‘이 솔직한 심정을 언제 얘기하지? 그냥 후딱 떠나버릴까?’
가끔 철딱서니 없던 공주는 야반도주하기로 하고 범선의 입력 창을 두드렸다.
‘동방의 다음번 파랑 나라로’
우직한 코발트블루 왕자는 여러 날 끙끙 앓으며 자신을 자책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마침내 왕자는 분홍공주를 찾아 조드푸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용감한 전사 ‘라오 조다’는 차마 데려가지 못하고 다음 서열의 부하 두 사람을 골랐다.
유럽에서 왕자는 분홍왕국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이는 그 왕국이 나폴리 왕국에 흡수되었다고 하고, 다른 이는 왕족의 대가 끊겼다고 했다. 나폴리 옆 지방을 아무리 헤매도 얼마 전까지 그토록 유명했다는 분홍을 찾을 수 없었다. 왕자는 홀로 고뇌를 곱씹기 위해 두 전사(戰士)들도 돌려보냈다. 조금 추스른 후에는 지중해 연안 이곳저곳을 방랑했다. 불같은 시련을 통과한 후 왕자는 더 맑고 신비로운 빛을 갖게 되었다. 그는 남프랑스에서 가난한 화가들과 어울렸다. 그들은 코발트블루에게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우정과 신뢰를 주었다.
왕자의 신분은 떠돌이 생활마저 쉽지 않은 법. 아버지가 예술가의 벗이 된 자신을 참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하 중 한 사람이 고향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왕자는 절친들과 작별하고 포르투갈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본명을 버리고 다른 이름으로 살았다. 새 이름 아줄레주로.
범선은 분홍 공주를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데려다 놓았다. 사람들의 생김새가 낯선 것이 더욱 동쪽으로 날아간 모양이었다. 공주는 이곳의 푸른 바다와 하늘빛에 깜짝 놀랐다. 이 나라 왕자라면 자신의 평생 반쪽이 될 것만 같았다.
“어서 가요. 파랑 왕자님~ 마님이 부르셔요.”
호칭이 반가워 해안 쪽을 바라보니 파랑은커녕 하얀색 긴 복장의 청년이 소나무 아래 정자에서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문제는 쉽게 다가갈 수 없다는 것. 남녀의 내외하는 정도가 심했다. 공주는 우선 목소리의 주인공을 포섭하여 도포와 갓이라고 불리는 의복을 얻었다. 상투하기 쉽게 머리도 자르고 한양의 이름난 선비 코스프레를 하기로 했다.
파랑 왕자는 도련님의 별명이라고 한다. 그의 이름은 쪽, 성은 람(藍). 하지만 왕자의 신분이 멀지는 않은 것이 이(李)씨가 왕이 되기 전 그의 몇 대 외가 선조가 고려의 왕족이었다고.
쪽은 푸름에 빠져 있었다. 자나 깨나 파랑 색을 구하여 이런저런 스케치를 했다. 물론 부모님께는 철저히 비밀로 어려운 초서를 쓰는 척.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아 두터운 우정을 주고받았다. 공주는 이제껏 들어 본 적이 없는 쪽의 이야기가 신기하기만 했다. 알고 보니 쪽은 눈에 보이는 파랑에만 관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시간 속으로, 마음 깊은 곳까지 데리고 갔다. 공주는 그동안 가볍게 행동하며, 눈에 보이는 것만 좇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분홍 공주는 친구 덕분에 침잠, 기다림, 기억하는 법을 배웠다. 쪽이랑은 대낮의 하늘보다도 밤의 깊음 속에서 더욱 신비한 파랑을 만났다. 하지만 우정이 깊어질수록 쪽의 슬픔에도 함께해야 했다. 양반 자제는 화공이 될 수 없는.
쪽이 절망할 때마다 분홍 공주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짐을 받아 두었다.
"재능을 묻어두면 안 돼. 네 피에 흐르는 예술 혼은 훗날 언젠가 꽃을 피울 거야."
공주의 북돋음에 쪽은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추스르며 부캐인 과거 시험을 준비해 나갔다.
쪽이 급제하여 동네잔치를 베풀던 날 공주는 떠나기로 했다. 자신이 여성임이 발각되면 쪽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고, 큰 혼란을 안겨 줄 테니까. 점점 추워지는 공기도 부담스러웠다. 지중해 부근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온도라.
‘동해 바다와 가을 하늘이 몹시 그리울 텐데….’
분홍 공주는 범선에 입력할 장소를 고민하다가 문득 호기심이 발동했다. 시간 여행도 해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가장 궁금한 시대는? 지금으로서는 쪽의 후대 모습이 가장 알고 싶다. 내 응원이 과연 보탬이 되었는지 어떤지.
‘20세기 쪽이네 후손’
범선이 멈춘 곳은 서울 부암동 환기 미술관이었다. 분홍 공주는 입구에서 한 무리의 방문객에게 쏟아내는 안내원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곳에 전시된 그의 작품 숫자는 사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뉴욕이나 전 세계에 퍼져 있으니까요.”
쪽과 성이 다르니 아마 외손주 후손인가 보다. 커다란 화폭을 거의 차지한 검푸름을 보니 쪽에 대한 그리움이 다소 진정되었다. 쪽이와 함께 보았던 별, 밤하늘의 푸르름이 거기 있었다.
큐레이터의 설명이 간간 귀에 들려왔다.
“천지인(天地人)이 한 화면에서 호흡하는 우주를 그리셨어요.”
분홍 공주는 20세기로 온 김에 이때의 유럽도 궁금했다. 곧 1년이 다가오지만 잠깐 방문하는 것은 괜찮을 듯싶었다.
‘같은 시대 유럽의 파랑나라로’
범선이 데려다준 나라의 이름은 ‘인터내셔널 이브클랭’이었다. 그야말로 순전한 파랑의 나라였다. 푸르름이 스스로 공간이 되어 막강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다른 빛들은 끽소리는커녕 숨소리마저 내지 못하는.
그 나라의 파랑은 벨벳 같은 질감으로 부드럽게 다가오다가도 곧 강렬한 채도가 추위를 몰고 왔다. 살며시 다시 바라보면 약간 보랏빛을 띠며 경건한 영성을 선사하기도 하고.
분홍은 이 나라의 파랑이 존경스럽기는 하나 왕자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 분위기상 왠지 억지로 그 앞으로 끌려가야 할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는 괜스레 혼자 벌벌 떨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나라의 파랑 왕자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떤 날 허공으로의 도약을 하다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고. I 이브클랭의 조금 어두운 분위기가 이 나라 파랑 빛의 속성인지 왕자를 애도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분홍 공주는 한숨을 몰아쉬며 다음 갈 곳을 입력했다.
‘좀 쉴만한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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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gen 작가님 3월 11일 발행 글 [블루-깊이의 색, 거리의 색]을 읽고 적어 본 댓글 동화입니다. 주제와 표현의 많은 부분을 그곳에서 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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