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 왕자를 찾아 (1)

댓글 동화, morgen 작가님 [블루- 깊이의 색, 거리의 색]

by 램즈이어

15세기 경 지중해 연안에 아담하지만 부유한 분홍 왕국이 있었다. 그곳은 울창한 숲과 사계절 만발하는 꽃으로 이웃 나폴리 왕국보다도 인기가 많았다. 임금은 날마다 방문객을 맞으며 답례품을 받느라 분주했다. 하지만 먼 나라의 진귀한 선물에도 불구하고 왕과 왕비의 마음은 늘 휑하기만 했다. 부부에게 자녀가 없어서였다. 나라가 번창할수록 후계가 없는 미래가 불안함으로 다가왔다.

어느 날 백발의 노인이 알현을 청하였다. 행색으로는 어느 나라 귀족은커녕 행려에 가까웠으나 문지기는 그를 왕 앞으로 인도했는데, 걸인으로 귀향한 오디세우스처럼 형형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몇 마디만 남기고 곧장 궁을 떠났다.


“내년 이듬해 왕은 딸을 얻을 것입니다.”

“아이가 16세가 되면 먼바다 건너로 배필을 찾아 떠나게 하십시오.”

“공주님은 파랑왕자를 만났을 때 자신의 짝임을 단박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공주 부부는 당신의 왕국을 자자손손 영화롭고 사랑받는 나라로 만들 겁니다.”


현자는 공주의 16세 생일 선물로 커다란 장난감 범선을 건네며 아이가 훗날 여행을 떠나기까지 비밀리 간수하기를 부탁했다.

공주의 탄생은 온 나라에 큰 기쁨을 주었다. 분홍 왕국은 이곳의 분홍빛이 유럽에서 가장 신비하고 순수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공주의 피부 빛은 그 나라의 어떤 분홍보다도 더욱 분홍스러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젊은이들을 한없는 설렘으로 이끌곤 했다.

하지만 공주의 성품은 전혀 분홍스럽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남자아이하고만 어울리고 장부 스타일의 기개가 사내보다도 더 거침없었다. 청년들은 공주의 외모에 끌려 두근거리다가도 그녀의 짓궂은 장난에 당황하여 물러서곤 했다. 왕비는 여장부로 자라 가는 공주가 한없이 걱정스러웠고 왕은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저 애는 긴 모험을 떠나야 하니.’

어느덧 공주는 16세 생일을 맞았다. 왕실 가족들이 여행짐을 챙겨 주느라 분주할 때 왕궁에 호화스러운 마차 행렬이 당도했다. 공주의 배우자감으로 파랑 왕자를 찾는다는 소문이 유럽을 거쳐 아시아까지 퍼져나간 여파였다. 첫 번째 구혼자로 찾아온 이는 산토리니 공국의 루미 왕자였다. 그는 영향력 있는 나라의 왕자답게 씩씩하며 도도했다. 무엇보다도 햇빛을 받아 빛나는 그의 파랑은 명랑하고 고귀할 뿐 아니라 그렇게 듬직할 수 없었다.

공주는 자신의 짝꿍이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푸른빛이 아무리 눈부시다 할지라도, 오래전 현자의 예언이 옳았음을 실감했다.

장난꾸러기 공주는 마음이 한껏 부풀어 있는 루미왕자에게 창검 시합을 제안했다. 다음 날 왕자는 하늘거리는 분홍 드레스 차림으로 창을 휘두르는 공주에게 완패하고 말았다. 그녀는 오랜 시간 무술을 연마한 사람처럼 허를 찌르는 묘수와 응축된 힘을 사용했다.

지혜롭고 겸손한 분홍 왕가(王家)는 이일을 함구하고 사람들의 오해도 조용히 감수하기로 했다. 루미왕자의 귀향 마차에는 분홍공주의 빼어난 자태도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소문의 꼬리가 달렸다. 이 때문에 산토리니의 파랑은 오늘날까지 온 세상에 위세를 떨치고 있다. 제주도보다 못한 섬인데도 그 파랑을 보기 위해 크루즈들은 어김없이 포구에서 한나절을 머문다. 태양열도 피할 겸 파랑을 돋보이기 위해 온통 하양으로 칠한 이아 마을은 마음대로 숙박료를 부른다.


며칠 후 볕이 좋은 어느 날 왕은 지하실에서 현자가 남긴 범선을 꺼내 오게 했다. 분홍 공주는 잔디밭에서 아버지와 함께 생일 선물을 맞이했다. 책에서나 바다에서 본 적이 없는 특이한 돛단배였다. 공주는 호기심에 못 이겨 자신의 몸 사이즈와 비슷한 배 안에 들어가 여기저기 만지며 살펴보았다.

“아빠! 여기 좀 보세요. 무슨 글자가 있어요.”

‘원하는 시간과 장소를 입력하세요. 작동기간 1년’

범상치 않은 물건에 왕은 17년 전(前) 현자의 방문을 떠올려 보았다.

“노인도 이상하기 그지없었는데…. 마치 공간,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는 뉘앙스군.”

공주는 벌써 무슨 말을 입력할까 궁리하고 있었다.


‘동방의 가장 멋진 파랑 나라로’


“아빠! 이렇게 넣어 볼까요?”

왕이 요거 저거를 가늠하며 오케이의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왈가닥 공주는 작동 버튼을 눌렀고, 두 사람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전에 이미 범선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분홍 공주는 이 모든 정황과 비상(飛上) 때문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참 후 공주가 비몽사몽 눈을 떴을 때 일렁이는 파랑 무늬의 움직임을 보았다. 집 모양의 가자미들이 유유자적 지나가고 커다란 산호초가 나무 모양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몽환적인 하늘색 풍경이 아직 꿈나라인 듯도 했다.

'이 요술 배는 하늘과 바다를 자유롭게 왕래하나?'

'혹, 인어공주의 나라?'

정신이 들수록 공주는 자신이 공기를 마시며 숨을 쉬고 있음을 알아챘다. 물속이 아니라 푸른 집들의 물결이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어떤 푯말에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조드푸르(Jodhpur), 인디아(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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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gen 작가님 3월 11일 발행 글 [블루-깊이의 색, 거리의 색]을 읽고 적어 본 댓글 동화입니다. 주제와 표현의 많은 부분을 그곳에서 빌렸습니다.

https://brunch.co.kr/@erding89/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