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의 봄 나들이

슈만 연가곡 시리즈 <미르테의 꽃> 음악회

by 램즈이어

바람도 약해지고 따사로운 기온이 계속되니 봄이 한 걸음 한 걸음 오고 있나 본데 그럴수록 좀 약이 올랐다. 한편으론 울적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남쪽 고장에 꽃망울 보러 간다, 산수유 축제다 어쩐다 하지만 갈 수 없는 형편이고, 아파트 단지라도 오래 걷고 싶지만 연일 미세먼지 나쁨이라서.

출근길 가로수 사이로 엉거주춤 피어있는 매화까지 회색으로 다가온다. “너도 매화였니?” 하며 뭔지 모를 동지애를 느꼈다. 그런 마음을 위로하려는 듯 지인이 초대해 준 음악회가 냉큼 다가왔다. 세종 체임버 홀에서 열린 슈만 연가곡 시리즈 <미르테의 꽃>이다. 미르테(Myrten)는 독일에서 신부의 화관으로 쓰이는 은매화라고 하니 여기서도 봄꽃놀이가 열린 셈이었다.

슈만의 연가곡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보다 경쾌하며 우울하지 않고, 가벼운 웃음소리마저 흐르는 것 같았다. 첫 곡은 리스트의 피아노 편곡으로 익숙한 <헌정>. 해설자의 이야기대로 클라라처럼 결혼 선물로 연가곡집을 받은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헌정’이라는 단어에 한동안 머물렀다. 평범한 우리들은 연인을 위해 무엇을 헌정할 수 있을까?

화면에 최두남 화가의 작품과 가곡의 가사를 나란히 띄워주고, 프로그램 집에도 독일어와 나란히 번역된 시(詩)가 실려 있었다. 외국 시인데도 내용이 또렷이 마음에 다가왔다. 슈만은 사랑을 위해, 어렵게 쟁취한 결혼을 위해 가곡을 지었지만, 부지중에 시인들의 시(詩)에 한 차원 높은 생명을 부여한 것 같다. 하이네의 <눈물 한 방울>, <연꽃>, 뤼케르트의 <동쪽의 장미 중에서>, 번즈의 <하이랜더의 작별>등은 선율과 가사에 서정(抒情)이 가득했다. 그 낭만을 좇아가다가 <하이랜드 자장가>에서 깜놀했다. 키드득 웃음까지도.


편안히 잘 자라 귀여운 도널드

위대한 로널드 쏘옥 빼닮은 아기

방금 태어난 작은 도둑이 누구를 닮았는지

부족의 어른들은 모두 잘 알고 있지


눈동자는 숯덩이처럼 새까 많구나

나이가 들면 나가서 망아지를 하나 훔쳐오렴

평원을 여기저기 돌아다녀

집에 올 때 이웃집 소 한 마리 집어 오렴


골짜기 로우랜드에도 내려가렴

거기서 제대로 도둑질을 해와야지

돈도 훔치고 행운도 훔쳐와서

하이랜드 고원으로 돌아오렴 *


찾아보니 로버트 번즈는 독일인이 아니고 스코틀랜드 농부시인으로 그의 익살을 드러낸 거였다. 하이랜더는 스코틀랜드 북부 고산 지대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거친 환경에서도 아이를 지키려는 부모의 사랑, 하이랜더의 강인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직한 독일어머니들이 슈만의 이 자장가로 아가를 재울 성싶지는 않다. 음악회 관중의 자장가로 남을 듯.)

인생의 곳곳에는 어떤 암시가 있다. 단조 빛깔의 마지막 곡에서 그런 것을 느꼈다. 곡과 가사 모두에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예견하는 듯한.


<마치며>


서글픔이 이슬처럼 무겁게 맺힌 땅 위에서

미완성의 화관을 그대에게 씌워요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하늘에서 허락하여 햇빛이 내리쬐면

우리의 화관을 사랑으로 완성해요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


연가곡을 부르는 남성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이상해진다. 그날도 훌륭한 바리톤의 미성(美聲)에 마음 설레어 옆에 앉아 있지도 않은 남편을 의식했다.

무엇보다도 내게는 소프라노 윤상아 와의 만남이 큰 수확이었다. 예로부터 빼어난 여성의 목소리를 꾀꼬리에 비유한다. 그날 밤 그것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꾀꼬리보다 더욱 꾀꼬리스러운(더욱 아름다운) 사람 꾀꼬리를 만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꾀꼬리 울음은 사람 목소리를 결코 따라올 수 없다는 것. 힘 있고 탄탄한데도 흠 없이 고우니 인간의 소리가 아닌 자연의 목소리 같았다. (하긴 사람도 자연의 일부지만) '천상의 목소리'라는 표현은 너도 나도 사용하니 쓰기가 싫다. 해설자도 현재 대한민국 최고이며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그 목소리는 “눈꽃” (작곡 여서윤, 작시 김대식)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겨울나무 위 화사한 함박눈의 그리움으로 데려가더니 목소리의 요정이 점점, 때를 의식한 듯, 봄꽃의 음표들을 터트려 놓았다.

3월 17일 저녁의 음악회는 내게 봄을 헌정해 준 것 같다. 먼지 하나 없이 맑은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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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 영시: 로버트 번즈, 슈만 가곡집의 독일어 번역: 김기민

** 원작 독일어 시: 뤼케르트, 번역 김기민

프로그램에서 ‘자매’라고 번역된 부분을 제가 아가서를 본떠 ‘누이’라고 바꿨습니다.


## 슈만 연가곡 시리즈 3 <미르테의 꽃: Myrten Op.25> 은

2026년 7월 4일 오후 8시 예술의 전당에서도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