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by 국모국경

나는 무엇일까요?

1) 실천에 의해 검증되어 태어나지 않았고

실천과 함께 성장하지도 않은 허약한 가설입니다.


나는 무엇일까요?

2) 교조(敎條)처럼 구체적 상황과 관계없이 믿고 따르지만

어떨 땐 현장에서 아무런 도움이 못 되기도 합니다.


나는 무엇일까요?

3) 각각의 상황을 반영해 사태를 옳게 판단하거나

일머리를 알아 순서 있게 처리하는 능력을 지니진 않았습니다.




오늘도 나는 보물찾기 하듯 샅샅이 뒤져 5개나 발견했습니다.

5개의 실체는 현장에서 지키지 못한 매뉴얼상 과실입니다.

5개나 찾았는데도 보물 찾기처럼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덮어도 될 것을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기분이었습니다.


매뉴얼이 전문가의 세련된 레시피라면

현장에서 시간과 경험으로 터득한 통찰은 대충 때려 넣는 손맛과 같은 것입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현장을 대응하기에는 그 어느 쪽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이 둘의 차이점은 전자의 결과적 잘못에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지만, 후자의 결과적 잘못에는 그 어떤 이유도 변명이 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살이에는 저마다의 속사정이 있습니다.

경찰의 재량권은 그 속사정까지 읽어 처리하도록 하는 '인간다움을 허용한 권한'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솔로몬(?)이 나타나

현장의 재량적 판단에 매뉴얼이라는 자를 대고선 선을 긋더니 삐뚤삐뚤한 곳을 찾아내고 벌을 하였습니다.

그러함으로써 나름의 합리적 판단에 도리어 합리적 의심이 생기고

이제는 제아무리 장발장이라 해도 봐주지 못하고

매뉴얼의 지시명령에 따라 사법 처리하게 되는 로봇 같다가도~

영화 <아이, 로봇> 속 주인공의 대사가 떠올라 그래도 '내가 인간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끝났구나 싶은 순간

(로봇이 나타나 외친다.) "위험합니다."

(경찰 대사) "저 소녀를 구해줘! 저 소녀를 구해줘! 잴 구해줘~"

(하지만 로봇은 주인공인 경찰을 구합니다.)

(경찰 대사) "날 구했어"

(여자 배우 대사) "로봇의 두뇌는 판단체계 자체가 달라요"

(경찰 대사) "날 구한 건 합리적이었지. 내 생존 가능성은 45%고 사라(소녀)는 단지 11%였으니.

하지만 걘 어린 소녀였고. 11%보다 낮은 확률이더라도 인간이라면 소녀를 먼저 구했을 거요!"



경찰의 살아있는 양심과 경험으로 만들어진 재량권이, 0으로 수축되질 않길 바라며...

무더위 속, 매뉴얼의 잣대로 따박따박 따져 들고 있는 나에게 정신만큼은 서늘하길 바라며 씁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떤 벤치마킹 <치안 인테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