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김수영 시인의 이름으로 적고 싶지는 않았다.
김수영 시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쓰고 싶었다.
그런데 제목란이 내게는 너무 짧다.
촌철살인의 한 단어 아니 짧은 한 문장으로라도 내가 하고픈 말을 표현하고 싶은데 아직도 그게 잘 안된다.
그래서 나의 글과 말들에서 언제나 부족함을 느낀다. 구질구질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런치의 관대함만을 믿고 또 이곳에서 말하고 쓴다.
문학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 김수영-
은유 작가의 책 <쓰기의 말들>에서 나오는 김수영의 글이다.
다시 말해 은유 작가가 인용한 것을 내가 다시 인용한다.
다만, 같은 문장이지만 인용의 의미는 좀 다른 것 같다.
은유 작가는 쓴 글을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은유 작가는 '이만하면'이라는 단어에서
'이만하면'을 경계하며 쓴 글 같았다.
왜냐하면 은유 작가의 책 마지막 문장은 아래와 같았기 때문이다.
'이만하면'이라는 말은 위험하다. 됐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대개의 원고는 '웬만하면' 한 번 더 다듬는 게 낫다.
반면, 난... '문학'과 '처지'라는 단어에서 이미 읽기를 멈췄다.
'문학',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았다.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언어로 사용함으로써 표현되는 예술이다.'이다 정의되어 있었다.
예술이라는 부분이 내겐 좀 어려운 단어라 '예술'을 다시 찾아봤다.
여기서 어렵다는 건 일반적인 단어 뜻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땐 단어의 이해를 내 마음에 들도록 선명하게 하기 위해 또 네이버 사전을 찾는다,
예술은 '미적 작품을 형성시키는 인간의 창조 활동'이다 정의하고 있다.
한 문장을 두고 은유작가와 내가 보이는 것이 달랐듯
이번에는 한 단어들을 두고 네이버 정의하는 것과 내가 그 단어들 속에서 느끼는 것이 다르다.
나에게 '문학'이라는 단어는 한자를 그대로 풀어서 '글을 배우다'이다.
글을 배우는 건 읽기 위해서다.
초등학교 시절 책을 읽는 이유는 모든 걸 직접경험으로 배울 수 없기에 책을 통해 간접경험으로라도 배우기 위해 책을 읽는다 가르침 받았었다.
결국
문학 즉 '글을 배우는 것'은 간접적으로라도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배우는 것이요. 사람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사람을 배운다는 것은 타인에 대해 무지한 채 함부로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기 위함이요. 타인의 처지를 생각해 보기 위함이라고...
그래서 타인의 처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이만하면' 하고 자신을 무지를 덮으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나는 이 문장을 해석하였다.
그리고 지금 쓰는 이 글은 실은 나 자신에게 하고 있는 말이다.
내가 감히 나를 '문학을 하는 사람이다'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매일 아침 112 신고철을 마주하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말이다.
'이만하면' 그들의 아픔을 이해했고
'이만하면' 그들을 도와주었고
'이만하면' 내가 경찰관으로서 할 일을 했다고
오만을 떨어서는 안 된다는...
그들이 112로 들려주지 않은 말들이 더 많음을... 그래서 나는 그들의 처지에 나의 무지함을 알고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함을. 이걸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나 자신에게 깨우쳐 주기 위해
오늘 아침 이 문장이 와닿았고 배운 글을 복습하듯 브런치를 열어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