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하루에도 100개가 넘는 의사결정을 하며 살아간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눈을 뜨자마자 두 개나 선택을 했다.
1. 일어날지 아니면 주말이니 주말답게 더 이불속에 있을지
=> 일어나자를 선택
2. 책을 이불속에서 볼 지 책 상 위에서 볼 지
=> 책상 위를 선택
그러나 어제부터 읽고 있는 책 '클루지'를 보지 않았다면 난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우선 1번 선택에서 '주말이니 주말답게'라는
합리화를 선택 앞에 붙여놓고 있었다
즉 '일어난다. 일어나지 않는다'이 두 가지 선택을 두고 공평하게 고민한 것 같지만 실은 이미 기울인 마음가짐 속에서 일어날지 말지를 고민한 것이었다.
다행히 책 '클루지'를 통해 평소 같았으면 보지 못했을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내 모습을 본 것이다.
그리고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은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을 만들었다.
결국 인생이라는 긴 시간에 대비시켜도 마찬가지다.
[의사결정의 결정체가 현재 내 모습이다.]
나는 현재의 내 모습이, 그리고 미래의 내 모습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책을 읽고 반성을 하고 새로운 결단을 내리기를 무한반복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까지 만이었다
결단까지만 내리고 시작이 반이라는 말에 정말 반이라도 온 것처럼 지쳐 행동하지는 않았다.
왜? 나의 결단이 행동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읽고 > 반성하고 > 결단 내리고
이 세 가지 트랙 위에서 돌기만 했는지...
그 답을 오늘 아침에서야 찾았다.
나도 모르게 내 의식 속에서 품고 산 '결단을 내리다'라는 말의 오류 때문이었다.
'결론을 내리다'라는 말의 소리처럼
뭔가를 내려버리면 ~ 정말이지 반쯤이라도 뭔가 해낸 것 같은 착각의 오류 그래서 반이라도 했으니 하는 안도의 오류. 가 내 안에서 머문 것이었다.
결단은 내리는 게 아니라 '결단'은 '잘라야'했다.
변화되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한 행동들.
그 행동들을 알아차린 지점에서
편히 내려놓는 게 아니라 과감히 잘라서 나로부터 '단절' 시키는 게 실은 '결단을 내리다'의 말의 의미였던 것이다.
엄마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포도나무의 순을 꺾어 버리곤 했다.
포도나무가 튼튼하게 그리고 포도가 맛있게 성장하는데 방해되는 그래서 제거해야만 하는 포도나무의 순들이라 했다.
이 순들은 무척이나 귀찮고 질겼다.
한 번에 제거되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짧게는 일주일, 길어봤자 이주일 간격으로 반복적으로 그 순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러다 보면 더는 나쁜 순들은 나오지 않았고 엄마도 멈췄다.
결단!
내리는 게 아니라 자르는 거였다.
포도나무의 성장에 불필요했던 '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