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키보드

by 소설가 서기주

체리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매끄러운 스위치의 반발력이 손끝으로 튀어 오른다. 방 안은 고요하다. 라디오도 끄고, 전화도 멀리 치웠다. 그 대신 귓속 깊은 곳에서 윙윙거리는 이명 소리가 흐른다. 오래된 의자에 겨울 패딩을 덮어 두었더니 등허리가 따뜻하게 눌린다. 키보드에서 흘러나오는 타닥타닥 소리가 리듬처럼 방 안을 채운다. 그 리듬이 마치 숨소리처럼 고르게 이어진다.

점심 식사 후의 서재다. 창문 너머로 인왕산 곡성바위가 보인다. 햇살이 느리게 바위를 훑고, 그 위로 바람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이곳은 나만의 공간이다. 아내에게는 먼지를 쓸어내야 할 장소이지만, 나에게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장소다. 책상 위엔 메모지와 연필, 마신 커피잔 하나가 있다. 조용한 오후, 시간은 고요히 눌러앉아 있다.


이 방은 편안하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편안함이 나를 게으르게 만든다. 너무 자유로운 탓일까. 나는 때때로 이곳에서 벗어나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도피한다. 거기서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쓸데없는 움직임을 삼가야 한다. 낯선 공기의 긴장감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집중된다. 서재와 도서관, 두 공간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개인 공간은 때로 위험하다. 문을 닫는 순간, 나는 방종과 창조 사이의 경계에 선다. 무의미한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또 그 안에서 새로운 문장이 태어나기도 한다. 자유와 불안은 언제나 함께 온다. 그 불안 속에서 언젠가 창조의 씨앗이 움틀 것이다. 아직은 그 과정을 견디는 중이다.


어린아이에게는 강제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스스로 자유를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떠올리며 나는 웃었다. 나 역시 아직 미성숙한 존재인가. 이 나이에 스스로를 단속하지 못한다니. 마치 유치원 아이들이 선생님 뒤를 따라 줄지어 걷듯, 나도 스스로를 이끌며 글의 행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국 결과가 말해준다. 공공장소에서 쓴 글보다, 이 은밀한 방에서 쓴 글이 더 많고 진하다. 그렇다면 이 방이 내게 맞는 것일까. 아니면 자유와 싸우는 나의 습성이 아직 덜 익은 걸까. 어쩌면 답은 중요하지 않다. 오늘도 나는 키보드 위에서 글자를 두드린다. 타닥, 타닥. 그 소리 속에서 나의 하루가 조금씩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