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눈꽃

by 소설가 서기주

<인왕산 눈꽃>


눈이 밤새 내렸다. 인왕산의 바위는 그 눈을 받아 적막하게 식어 있었다. 바위는 오래된 상처처럼 골이 패였고, 그 틈마다 흰 눈이 스며들었다. 바람은 멎어 있었다. 소나무 숲은 한 덩어리의 침묵으로 굳어 있었고, 가지마다 쌓인 눈은 무게를 견디며 아득히 버티고 있었다.


산은 말이 없었다. 산은 늘 그랬다. 인간이 떠드는 동안에도 산은 묵묵히 계절을 받아냈다. 햇빛이 구름을 뚫고 내려오자 바위 하나가 잠시 빛났다. 빛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겨울의 산은 빛을 오래 붙잡지 않는다. 빛은 흘러갔고, 바위는 다시 그 어두운 본래의 결로 돌아갔다.


능선을 따라 눈이 길을 만들었다. 길은 아무도 걸어가지 않았으나,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길처럼 단단했다. 산비탈의 잔가지들은 얼음막을 두른 채 겨울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고, 그 위로 눈송이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눈은 가볍게 내렸으나, 그 가벼움 속에는 오래된 무게가 있었다. 계절의 무게, 시간의 무게였다.


멀리서 보면 산은 크고 단단한 성채였다. 가까이서 보면 바위 하나, 가지 하나에도 삶의 흔적 같은 결이 있었다. 산은 인간의 시간 밖에서 살았고, 그 밖에서 견뎠다. 겨울의 인왕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한 도시의 숨을 가만히 끌어안고 있었다.


오늘 눈은 산을 덮었으나, 산을 감추지는 못했다. 바위의 골과 나무의 뼈대는 그 눈밭 아래에서도 드러나 있었다. 드러난 것들은 산이 숨기지 못하는 진실처럼 또렷했다. 겨울의 산은 꾸미지 않았다. 꾸밀 수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크기와 무늬로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