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영등포역

by 소설가 서기주

1

독중이는 친구 도단배처럼 오십여 년 전, 이곳 영등포역을 통해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때도 역 앞 넓은 길 위로 버스의 낮은 엔진 소리가 천천히 흘렀고, 둥근 기둥이 늘어선 영등포역 처마 아래에서 사람들은 검은 점처럼 모였다가 흩어졌다. 먼지가 공기 속에 얇게 떠올랐다.


2

"그래, 대림동은 아무 소식이 없단 말이야."

도단배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바로 사라졌어. 나도 대림동에 살던 연변 사람들에게 알아봤는데, 그 여자가 중국으로 돌아갔다고도 하고, 어디선가 불법체류자로 일하고 있다는 말도 있었어."

독중이는 얼굴을 바로 들지 못한 채 더듬더듬 말했다.

도단배의 가정이 무너진 일이, 자신과 얽힌 삼각관계 때문이었다는 죄책감에 그는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세상이 좁다더니, 하여튼 이렇게 또 만나게 되었군."

도단배의 중얼거림을 그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영등포에서 첫 출근을 하던 날, 운명처럼 다시 도단배를 만났다.

두 사람은 영등포역 뒷골목의 허름한 음식점에 마주 앉았다.


3

독중이는 영등포를 무대로 살아왔다.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한때는 대림동에서 조선족 여성과 함께 살았던 기억이 깊이 얽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자, 한잔 받아라."

도단배는 막걸리 잔을 건넸다.

"그동안 미안했네."

독중이는 몇 잔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마음을 풀어갔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담긴 통태탕은 걸쭉하고 매콤했다. 그 국물을 안주 삼아 마시는 막걸리는 속을 뜨뜻하게 데워 주었다.

그는 이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먹는 음식이 좋았다.

도자기에 담긴 몇 젓가락 안주와 값비싼 술보다, 이런 음식이 더 좋았다.

부담스러운 자리에서 눈치를 보며 마시는 술보다, 이 동네 사람들이 더 좋았다.

이곳 사람들은 속이고 속는 일 속에서도 금세 잊고, 다시 만나면 서로 용서하는 사람들이었다.


4

추억과 미운정, 고운정이 뒤엉킨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이곳 영등포에 다시 출근을 시작한 것이 그는 기뻤다.

역 앞을 지나는 버스의 낮은 엔진 소리가 저녁 공기 속에서 길게 늘어졌다.

처마 아래 둥근 기둥 사이로 사람들이 천천히 스며들 듯 오갔다.

독중이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문득 알 것 같았다.

일이라는 것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같은 길을 걸어 나가고,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 속에 있었다.

그는 그동안 잊고 있던 것을 이제야 조금씩 되찾고 있었다.


5

막걸리 잔 바닥에 남은 하얀 거품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식당 문틈으로 스며든 저녁 바람이 통태탕의 김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그 속에서 오래된 골목 냄새와 젖은 흙 냄새가 엷게 올라왔다.

독중이는 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등포는 그가 처음 서울에 발을 내딛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발을 딛는 곳이 되었다.

세월은 사람을 멀리 밀어내는 것 같다가도, 끝내 처음 서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그는 역 쪽을 향해 걸어 나갔다.

둥근 기둥 사이로 불빛이 하나씩 켜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검은 점처럼 모였다가 흩어졌다.

독중이는 그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이번에는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