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르클레어 Sep 12. 2024

나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무색무취 인간

“굉장히 예민한 성격이에요. 민감해요. 그래서 힘들었을 거예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네? 제가 예민하다고요?”

‘이 선생님 돌팔이 아니야? 병원 옮겨?’


난 평생을 예민과 먼 삶을 살아왔다.

음식으로 속 썩이는 일이나 잠투정도 없었고, 인간관계도 큰 문제가 없었다. (사춘기시절은 뺀다.)

그야말로 무난하다고 불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인간이었다.

외형도 예민과 반대였다.

보통 예민하다고 하면 마르고.. 좀 다르지 않나?

난 평범한 몸매로 말라보고 싶어 평생 다이어트를 했던 인간이었다. (다이어트는 언제나 실패했다. 식욕이 언제나 이겼다.)

이런 내가 예민하다니..

황당했다.


내가 예민하다면 내가 알고 있는 난 누구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좋아하는 음식, 영화, 책, 동물…’

많은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바로 대답이 튀어나올 테지만 난 아니었다.

”어…. 어…. 뭐지? “ 가 먼저 튀어나왔다.

“음식? 글쎄… 영화? 재미있게 본 영화가 뭐였더라.. 책? 흠..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데.. 그 작가의 모든 책을 읽은 건 아닌데…”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뭐야? 나 왜 이래… 이럴 수가..‘

생각해 보면 난 어렸을 때부터 자기소개 시간을 싫어했다.

‘지극히 평범했던 나를 소개하라니 할 말도 없는데.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도 지루하겠다.’ 라는 생각에 자기소개 시간이 두렵기까지 했다.

난 좋아하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없었다.

그러니 질문에 답을 못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사람에게 무색무취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악플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색이 있는데, 색의 채도가 다 다르듯 모두 다르다고 생각했다. 색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은 색이 바래서 그런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무색무취라는 표현을 사람에게 쓰는 사람들이 싫었다.

‘그 사람의 삶을 어떻게 알기에 저렇게 무례한 거야?’

그런데 그 말을 써야했다.

누구에게? 나에게.

혐오에 가깝던 그 말이 나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난 강한 햇빛으로 인해 바랜 것도 아니였고 본래의 옅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색이 없었다. 무색.

그리고 향도 없었다.

난 투명에 가까운 인간, 주관이 없는 인간이었다.


무색무취 인간인 것도 억울한데 나에대해 파악도 못하는 인간이라니 한심했다.

‘도대체 난 어떻게 살았던 걸까? 그저 남이 좋으면 좋다고 맞춰주는 그런 인간이었던 건가?’

앞으로 무색무취 인간으로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하나?

싫었다.

좋아하는 것,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자.

다채로운 색을 가진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바랜 색이라도 좋으니 그저 색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색이 없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나를 찾아봐.

나를 찾아줘.


먼저 내가 예민하다면 어떤 점이 예민한건지 생각해보았다.

우선 감각.

난 오감 중 네 가지 감각이 예민하다.

청각, 후각, 미각은 굉장히 예민하고 촉각은 그 아래 단계다. 시각은 세상 평범하다.

1. 미각 : 맛에 민감하다.

난 고기의 누린내는 물론 음식의 맛을 잘 파악한다. 어렸을 때부터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티 안 나게 먹지 않는다.

2. 청각 : 잠귀가 밝다. 소리구분 가능

청각은 가족 모두 인정할 정도로 많이 예민하다. 그래서 노이즈캔슬링을 자주 쓴다.

3. 후각 : 냄새에 민감하다.

냄새에 민감하다. 황사와 미세먼지만 아니라면 환기는 내 삶의 일부다.

4. 촉각: 예민하다고 생각하는 감각 중 무딘 편이지만 선호하는 소재가 있다. 소나무 같은 취향을 가졌다.

이렇게 써보니 진짜 별거 아닌 것 같다.

누구나 오감 중 한두 가지는 튀게 예민한 것 같은데 강도의 차이인가?

써보니 별 거 아닌 것 같으면서 별 거 같은 애매한 느낌이긴 하다.

누구나 이 정도의 예민함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니야?


성격 파악을 위해 했던 일은 MBTI 간이검사다.

완벽한 I형에 끊임없이 생각하는 인간. 딱 나다.

결과에 나온 설명이 딱 나와 비슷하다.

그동안 가족에게 성격 이상하다고 구박받았는데,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위안을 받았다.

MBTI를 맹신하면 안 된다지만 결과가 공감 가는데 믿어야지.

MBTI 만세.


그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그럼 뭐가 있을까?

난 옛날 이탈리아 영화를 좋아한다. ‘시네마 천국’과 ‘인생은 아름다워’를 너무 사랑한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100번은 본 영화들이다.

음악은 가사만 예쁘면 다 듣는다. 힙합만 아니라면 음악에 편식이 없다. 그래도 가사가 예쁜 발라드가 제일 좋다.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을 읽고 추리소설에 빠졌다.

그리고 제인오스틴 소설에 열광한다.

나는 책을 좋아하지만 많이 읽지는 못하는 지적허영심을 가진 인간이다.

터콰이즈 블루를 좋아한다.

달달한 디저트를 좋아한다.

블랙코메디를 보고 배꼽빠지게 웃는다.

혼자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난 뚜렷한 취향을 가지진 못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게 있는 나름 나만의 취향을 가진 인간이였다.

좋아하는 것이 내 몸 어딘가 깊숙이 묻혀서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우울증 환자가 되고 나를 알아가는 연습을 했다.


우울증 덕분에

나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나를 찾아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웰컴! 검은 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