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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클레어 Sep 05. 2024

웰컴! 검은 개

피할 수 없으면 버티자

”우울증 초기가 맞아요. 불안증상 있네요. “

몇 가지 검사 후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우울증이 깊지 않으니 약 용량은 최소로 할게요. 혹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매주 와서 체크해야 해요. 음~그런데 불안이 너무 높아요. 다른 약 한 가지 더 드릴게요. 불안하면 주저하지 말고 바로 드세요. 대신 하루에 세 번 이상 먹으면 안 돼요. 더 먹을 것 같으면 병원에 전화하세요.”

약 중독부터 이것저것 물어보자고 마음먹었는데 대답은 짧은 “네”였다.


상담실을 나왔다.

‘공식적으로 우울증 환자로 인정받았네.‘

이 생각만 들었을 뿐, 어떠한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난 우울증 환자였다.

병원을 나와 약국으로 향했다.

처방전을 내밀었는데 부끄러웠다.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닌데 내 처방전을 보고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무서웠다.

약사에게 약 복용에 대해 듣고 약국을 얼른 나왔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평온한 모습과 달리 내 머릿속은 토론이 한창이었다.

‘약 먹지말자. 의사한테도 먹었다고 거짓말하면 돼. 아니면 다음 주에 병원을 안 가도 되는 거야. 먹다가 중독되면 어떡하지. 의존도가 높아지면 어떡하냐고!‘  

vs ‘아니야. 약은 꼭 먹어야 해. 내가 이겨내야 우울증을 버텨야 아이를 키울 수 있어. 의존도가 높을 수 없잖아! 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인데!’

토론은 치열했다.

사실 이 토론은 시작 전부터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약을 먹지 말자는 쪽이 우세했다.

약을 먹으면 빼도 박도 못하는 우울증 환자가 될 것 같아서 먹기 싫었다.

내가 내 자신을 우울증 환자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약과 물컵을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안 먹고 버틸 순 없을까?‘

이 생각만 내 머릿속을 가득이었다.

내 상태는 우울증 약을 먹어야 버틸 수 있는 상태였다.

나사 빠진 인간. 그게 나였다.

눈은 텅 비어있고 얼굴은 우울함이 가득했고 감정기복도 심했고 잘 까먹었다.

“불안한 상태를 표현해 보세요.”라고 말한다면 “저요!”라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불면증이 점점 심해졌다.

겨우 잠이 들어도 깊은 잠에 들 수 없었다.

‘죽고 싶다’라는 생각도 매일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머릿속에 저 생각만 있었다.


빨래를 널다가 한참을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저렇게 빛났었나?’

‘여기서 떨어지면 진짜 죽는 건가?‘

죽는다는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내가 싫었다.

눈물이 났다.

‘왜 이렇게 망가진 거지?’

서글펐다.

집에 혼자 있었기에 마음 편히 펑펑 울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내 직업은 엄마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해 주는 아이가 있었기에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했다.

그래서 육아와 살림에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이것도 안한다면 내 자신도 살림도 육아도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질 것 같았다.

아이에게 내 우울을 숨기고 싶었다.

마음은 지옥이였지만 내 지옥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 지옥엔 나만 있으면 됐다.


아이는 엄마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알고는 혼자 선물 받은 레고를 만들었다.

티 안 내겠다고 했는데 실패했다.

그래도 혼자 노는 아이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약을 두고 아이 옆에 앉았다.

모든 레고에는 본품 블록 말고 예비용 블록 몇 개가 꼭 들어있다.  

예비용 블록은 꼭 필요한 블록은 아니지만 있으면 좋다.

만약 본품 레고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레고박스에 처박혀진다.


아이가 만드는 레고를 보고있는데, 예비용 블록과 내가 꼭 닮았다는 걸 알았다.

꼭 필요한 건 아닌데, 혹시 몰라 있는 스페어.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아이를 키우니 있어도 되는 존재.

그런데 꼭 필요하지 않은 잉여 인간.

예비용 레고와 난 같은 처지였다.

‘나 이런 삶을 원했던거야?’


예비용 블록들을 한참을 바라보다 처방받아온 정신과 약을 삼켰다.

억울했다.

그리고 이겨내야 할 것 같았다.

엄마가 힘들어 보인다고 혼자 노는 아이가 있는데 무책임한 엄마가 되긴 싫었다.

아이에게 보호막이 되겠다는 다짐 했는데

내가 아무리 포기가 빠른 인간이라지만

다른 약속은 쉽게 포기해도

아이에게 한 내 다짐은 무조건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마저 지키지 않으면 정말 난 쓸모없는 인간이 될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지만 너무 살고 싶었다.

삶은 지옥이라지만 그 지옥에서 행복을 찾고 싶었다.

예전엔 당연하게 생각했던 소소한 행복을 찾아보고 싶었다.

잉여인간이 아닌 쓸모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아이에게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래. 괴롭더라도 지금을 버텨보자’

피할 수 없으면 죽도록 버티면 된다.


웰컴! 검은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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