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세요
더 이상은 무리임을 깨달은 건 동아리 친구들과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에게 버스는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바쁜 서울 생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을 때뿐이다. 보통 30분의 이동시간이 걸리니 생각을 정리하거나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엔 딱이었다. 이제 조금 쉬면서 집에 갈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사람의 체형으로 패인 의자에 몸을 기댔다.
밤 10시에도 환한 서울의 야경을 따라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도 집에 도착해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방금 전 동아리 친구가 했던 말이 찜찜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 그거 상반기에 다 할 수 있겠어?? 너무 욕심부린 거 아니야??” 급격한 불안이 나를 덮쳐왔다. 불안의 적은 무계획이라 생각해 왔던가…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들을 급히 그려봤다. 21학점의 시간표, 학술모임, 당장 이번주에 계획된 엠티, 동아리, 2주 후에 있을 토익 시험, 알바, 친구들과의 약속까지… 머릿속으로 상반기 계획을 그려보기엔 너무나 많은 가지 수였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이 모든 것의 성과가 나왔을 때 난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원초적이고 노골적으로, 나 이 모든 것에서 A 이상의 성적표를 받을 수 있나? 앞 좌석에 앉아있던 사람의 향수 냄새가 속을 매끄럽게 했고 뒷 통수를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버스가 정거장을 거칠수록 끝도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은 내 숨통을 조이러 오는 것만 같았고 시야가 흐려지고 금방이라도 토를 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버텼다. 악착같이 내려야 할 곳에서 벨을 누르고 행여 버스 요금이라도 더 나갈라 교통카드까지 완벽히 찍은 다음 땅에 발을 우뚝 세웠다. 헬조선에 태어난 이상 정신력이 곧 생존력이다. 버티면 다 되는 거다. 버텨보는 거다.
밤 11시 기숙사에 도착해서, 서둘러 씻었다. 버스 안에서의 계획과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난 11시 20분에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룸메와 짧은 인사를 마치고 황급히 옷을 벗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은 없었다. 그저 짧은 시간 안에 샴푸를 짜고 헹구고, 린스를 짜고 헹구고, 바디워시를 짜고 헹구는 과정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샴푸 통이 내 손을 벗어나 바닥에 떨어진다면 다시 줍는 그만큼의 시간을 버리는 거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초 빠른 샤워를 마치고 곧장 의자에 앉으면서 룸메에게 선언했다. “나 진짜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 내가 벌려놓은 일이 너무 많아서 여유롭게 살다 간 망해버릴 거야” 룸메가 답했다. “그걸 이제 알았냐. 21학점이 뭐 쉬운 거라고” 헤어드라이기를 꼽으며 내가 말했다. ”응,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죽어라 하게. 내가 선택하고 저지른 일들이니까 버티면 다 되겠지. 버티면 그냥 될 거니까 죽어라 해야지.” 룸메가 침대에 누웠다. ”그래라, 열심히 해.”
오늘은 학기가 시작한 지 2주가 되는 날이었고 중간고사는 8주 차, 한 달 이상이 남아있었다.
룸메는 이른 잠자리에 들었고 열의에 불타 새벽 3시까지 책상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새벽 3시, 방의 모든 불이 꺼졌고 난 침대에 몸을 뉘였다.
내일 어떤 절망이 다가올지 예상조차 하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