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부터 1년간 한달살기로 전국일주를 하리라 계획했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퇴직 후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사는 삶'을 오랜 기간 꿈꾸어왔다.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점과 나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아버지의 존재. 이 두 가지 이유에서 타협된 여행지가 국내일주였다.
국내 어디든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아버지한테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가까이에 있는 동생이 일차로 주보호자를 하고 내가 필요할 때 같이 동원되는 식이다. 그동안 내가 주보호자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동생도 이 점에선 이해를 하는 눈치였다.
3월 30일 아침 동생으로부터 아버지의 부고를 받았다. 부산 한달 여행에서 월말인 29일 대구 집으로 돌아온 지 만 24시간도 안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동안 아버지에 대해선 간병도 교대로 다니고 병원과 긴밀히 연락도 주고받아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참이라 더 뜻밖이었다.
갑작스레 심정지가 왔고 사인(死因)은 '코로나로 인한 폐렴'이라고 한다. 3월 부산 여행 도중 두 차례나 간병을 위해 구미 병원에 갔을 때도 호흡에는 문제가 없었다. 팔순이 넘어 기저질환이 있긴 해도 누워계신 상태에서 계속 소리를 지르는 등 기운도 있어 보였고 퇴원하면 금세 회복하리라 생각했다.
원래 요양원에서 지내시던 아버지는 2월 중순에 코로나에 감염되어 입원 치료를 받았고 격리 해제되어 기저질환과 폐렴 치료를 추가로 받은 후 퇴원하셨다. 퇴원 후 요양원에서 열흘쯤 지내셨으니 코로나에 처음 걸린 지 약 한 달 열흘만에 돌아가신 거였다.
무빈소로 장례를 치렀다. 동생들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역할을 분담해주어 3일장이 마무리되었다. 아버지가 평소 좋아하셨던, 손수 꾸민, 고향 선산의 할머니와 엄마 계신 곳 옆에 잠드셨다.
사실 내 손으로 시신을 같이 들고 안치실로 옮겼는데도 아버지의 죽음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엄마 돌아가신 후 8년 반 동안 전적으로 우리의 부양을 받는 존재였다. 출퇴근제 주간노인센터를 5년간 다니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최근 몇 달 전에 요양원으로 모셔졌다. 이제 곧 요양병원으로 옮겨져 줄곧 누워 지내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알았을까. 삶의 질이 더 떨어지기 전에 이쯤 해서 매듭지으신 걸까.
4월 1일 장례를 모두 마치고 대구 집에서 며칠 더 몸과 마음을 추스를까 하다가 다음날 오후에 옷가방을 차에 싣고 4월 여행지인 거제로 내려왔다. 3월부터 한달살기 여행을 다니다 보니 3월엔 부산이 우리 집이었고 4월엔 거제가 우리 집이다. 3월 부산과 4월 거제는 내게 '아버지의 존재'와 '부재'로 나뉜다.
3월 중에 부산에서 올라와 아버지 간병차 대구 우리 집에 잠시 들렀을 때 이상하게도 집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저 익숙한 공간이 집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 집이었던 것이다. 한편 아버지와 얽힌 일이 많았던 대구도 잠시 물리적으로 떠나 공간 분리를 하는 게 신변 정리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여행을 멈추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족의 질병과 부양의 문제? 아버지 돌봄을 염두에 두고 여행을 계획했고 갑작스럽긴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마무리했다. 이제 내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삶이 어떤 이유에든 멈추지 않듯, 여행도 멈추지 않는다.
여행이 굳이 일상 삶과 구별될 필요가 있을까? 여행은 길 위의 삶일 뿐이다. 올해 내가 선택한 내 삶의 방식이다. 나는 오늘도 길 위의 삶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