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며칠 베이징 동계올림픽 중계가 한창이다. 은빛 빙판을 가르며 노련하게 질주하는 스케이트 선수들을 보다가 작년에 새로 산 스케이트화가 생각났다. 당근 마켓에서 저렴하게 사서 좋아라 했는데 한 번도 못 탔다. 작년에 코로나로 실내 빙상장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한 탓이었다. 빙상장이 정상 운영을 한다는 걸 확인하고 새 스케이트를 꺼내 들고 빙상장으로 갔다.
빙상장에 가니 입구에서 신원 확인용 큐알 체크를 하란다. 표도 무인 매표기에서 사라고 했다. 주차 등록도 키오스크에 직접 하라고 한다. 안내된 순서를 보고 자동차 번호도 누르고 주차 시간도 눌렀더니 어찌어찌 등록이 되었다. 언제부터 '무인 자동화'가 이토록 깊숙이 우리 생활에 들어와 있는지 새삼 놀랐다.
'큐알 체크인'과 '매표'와 '주차 등록'까지 입장을 위한 3종 디지털 관문을 차례대로 패스한 나는 이제 아날로그적인 활동을 하러 들어간다. 나이 지긋한 노장(?)의 아줌마가 혼자 와서 스케이트화 끈을 동여 메고 아이스링크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이라 스케이트장이 한산하다. 타는 사람들 면면을 보니진짜 내가 노장, 아니 노안이네.
몇 년 만에 신어보는 스케이트화인가. 막상 얼음 판에 서니 아장아장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30분쯤 타니 얼음판과 조금 친해진다.자연스럽게 발이 미끄러져가니 자신감도 조금 올라오고 그제야 얼음판 위 상쾌한 공기가 느껴진다. 그래 이 맛이야! 얼음판에서 미끄러질 때 밑창의 칼날에서 전해져오는 짜릿한 촉감과 알싸하게 차가운 공기가 내 몸을 비켜가는 이 느낌. 이 맛에 스케이트를 타지.
둘째 아이 여섯 살 때 스케이트화 신겨주고 레슨 시간 동안 대기하다가 태워오는 보호자 노릇 하느라 스케이트장을 들락거렸던 시절이 생각났다. 기다리는 시간이 무료해서 나도 연습용 스케이트화를 사 신고 두 달쯤 레슨을 받았다. 20여년 전 그때 난생처음 얼음판을 살살 미끄러져본 경험이 지금 나를 스케이트장으로 이끌었다. 몸으로 배운 건 언제든 필요할 때 써먹을 수 있다니 신기하다.
스케이트는 균형 운동이다. 운동이든 뭐든 균형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 있겠냐만 특히 스케이트는 무게 중심이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얼음판과 예민하게 싸워야 한다. 스케이트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운동이다. 얼음판 위에선 조금만 딴생각을 하면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넘어지게 된다. 속도도 욕심낼 필요 없이 묵묵히 자신의 페이스대로 타면 된다. 나의 다음 도전은 한 발로 미끄러지며 타기, 그 다음은 코너 돌기다.
자신에게 집중해서 균형을 잡을 때 스케이트는 즐거워진다. 막 은퇴한 요즈음의 나의 관심사와 닮았다. '나에게 집중하기' 즉 나를 잘 들여다보고 내 시간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집중하기. 쉼과 활동의 균형 유지. 그리고, 가족과 지인 및 내가 속한 사회 속에서 '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스케이트를 타고 나와 매점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려고 보니 생전 처음 보는 무시무시한 기계가 버티고 서 있었다. 캡슐 커피자판기였다. '그냥 마시지 말까?' '아니야. 뭐든 처음이 있는 법. 나 운전면허 소지자야. 설마 자동차 운전보다 어렵겠어? 게다가 다 한글이잖아.' 나를 잘 설득해서 미션에 응해보기로 했다.
1) 신용 카드를 넣는다.
2) 원하는 커피 종류의 번호를 누른다.
3) 튀어나온 캡슐 커피를 꺼낸다.
4) 캡슐 커피 주입구에 캡슐을 집어넣고 종이컵을 갖다 놓는다.
5) 커피 추출 상태 3단계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래서 성공했다. 신문물 자판기에서 나온 커피라 그런지 커피 맛도 세련된 맛이다. 도전한 자만이 누리는 맛이다. 균형과 집중 속에서 매일 새로운 도전이 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