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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Nov 15. 2021

제주에서 '왕따 아님' 인증법

은퇴 후 난생처음, 공짜 귤

11월, 바야흐로 제주는 귤이다. 11월은 귤 나라 제주의 귤 익는 계절이요, 귤 따는 계절이다.


제주를 색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색이 어울릴까? 검은색? 용암이 흘러 흩뿌리듯 바닷가에 뿌려놓은 이름조차 '검을 현'의 현무암이 지천이라 맨 먼저 검은색이 떠오른다. 제주 색 이야기에서 바다 색이 빠질 수 없지. 검은 돌과 대비되어 더 푸르고 더 옥빛 찬란 제주 바다 파란색이야말로 제주를 대표하는 색이 아닐까? 그러나 11월만큼은 제주는 귤색으로 물든다.


가을이 최절정에 달했을 때 제주 걷기 여행을 다녀왔다. 주변에서 다들 물었다. 제주 단풍이 어땠냐고. 내 대답은 "제주에서 단풍 못 봤는데요? 그냥 억새가 있어서 가을 분위기 좀 났고... 귤이 많이 열렸던데요?"


난생처음 가 본 11월의 제주는 그랬다. 특히 내가 걸었던 제주 남서부 화순대정 올레길 9코스에서 12코스 동안  단풍나무나 은행나무, 느티나무처럼 육지에서 가을을 물들이는 단풍류의 나무들을 보지 못했다. 시야엔 파랗기만한 어린 야자수들과 이름 모를 초록 풀과 관목들이 주로 보였고 푸른 잎 사이사이로 더러 나부끼는 몇 줄기 억새만이 육지의 가을과 닮아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걸으면서 수도 없이 만나는 귤나무에 노랗게 달린 귤들이 제주 가을을 말해주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지난번 여행에서 걷던 올레길에 이어 걷기 작했다. 출발한 지 1시간도 안되어 길거리에 '*파치'라고 써서 내어놓은 귤을 보았다(*파(破)치:깨어지거나 흠이 나서 못쓰는 물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귤이었다. 아니 이렇게 상태 좋은 귤을 공짜로 내어놓다니. 제주 귤 철을 처음 겪어보는 외지인인 나는 깜짝 놀랐다. 같이 걷던 동행친구와 둘이서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양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비닐을 꺼내 귤을 몇 개씩 담았다. 그래, 이런 걸 두고 횡재라고 하지. 길 가면서 까먹으니 음료가 필요 없다. 입안에서 터지는 귤즙이 공짜라 더 달콤했다.



올레꾼으로 걷는 며칠 내내 공짜 귤을 얻어먹었다. 식당에 가면 상차림에 시키지도 않은 귤 한 접시가 그냥 나오기도 하고 계산대에서 식사값을 낼 때 원하는 양만큼 귤을 집어 가게 하는 곳도 있었다. 귤밭 옆을 지나다가 수확하고 버려놓은 귤 더미도 많이 만났다. 상품이 안 되는 귤을 모아 방치해두었겠지만 여기서도 잘 고르면 제법 먹을만한 귤들을 건질 수 있었다.




귤은 조선시대에는 왕에게 진상하는 진상품이었고 최고급 관리는 되어야 왕이 특별히 하사할 겨우 맛볼 있었다고 한다. 농가에서 1년간 고생해서 농사한 열매를 아무런 대가 없이 실컷 먹고 다니는 나는 조선시대 고관대작을 넘어 임금님 부러울 게 없었다. 길 나그네 목마르랴 제주 농민이 탁발 보시한 새콤달콤한 귤을 먹으며 걸으려니 황송하고도 미안했다. 본격적인 수확철엔 손 하나라도 아쉬울 텐데 몇 시간이라도 귤 따는 일을 거들고 귤을 얻어가 안 될까?


제주에서 귤 사 먹으면 왕따라고 한다. 아무런 연고 없는 관광객조차 공짜 귤을 먹이고 왕따를 안 시키는 제주에 감동할 지경이다. 제주 자연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제주 인심의 넉넉함에 한 번 더 반한다.

 

외지인들이여, 11월이 가기 전 제주에 가서 자신이 왕따인지 아닌지 테스트해보라. 난 여행 나흘 내내 공짜 귤만 실컷 먹고 돌아다녔으므로 '왕따 아님' 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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