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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Nov 12. 2021

낙엽 쓸기의 즐거움

은퇴 후 난생처음, 반퇴자의 낙엽 쓸기

교문 앞 낙엽이 뒹군다. 11월 초순이라 매일 하루가 다르게 낙엽이 쌓이고 있다. 요즘 아침 등교시간에 교문 진입로의 낙엽을 쓸고 있다. 출근하던 몇몇 동료가 묻는다. "*선생님이 왜 그걸 쓰세요? 누가 시켜요?" "아니. 내가 시켜서 하지요."(*엄밀히 말하면 나는 선생님이 아니다. 하지만 학교에 근무하는 성인은 다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통한다.)


내가 학교에서 하는 오전 근무 중 주된 일은 '등교 시 교통안전 지도'이다. 매일 아침 30분 정도 후문 앞에 서서 등교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교통안전을 돕는 일이다. 그런데 이곳은 딱히 지도할 거리가 없다. 교문 앞이 막다른 산 아래 후미진 곳이라 차의 통행이 거의 없는 데다가 교문 앞 차도 건너편에서 차도를 건너 등교하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극히 안전한 길로 다들 알아서 잘 오는 아이들을 '교문 앞에서 맞아주며 인사하는 일'이 사실상 나의 아침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아침 근무' 때, 아이들과 인사도 하고 아침 햇볕도 쬐면서 짬짬이 영어 문장도 중얼거리며 매일 30분씩 서 있을만했다. 그런데 11월이 되니 밖에 서 있는 일이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더더욱 그랬다. 추우니까 시간도 더디 간다. 마침 낙엽 시즌이라 진입로는 이리저리 뒹구는 낙엽들로 나날이 지저분해지고 있었다. 그렇지! 낙엽을 쓸어보면 어떨까?



분위기를 보아하니 학교에선 아무도 진입로에 뒹구는 낙엽에 관심이 없다. 주무관님도, 교장선생님도. 계절 특성상 떨어지고 또 떨어질 테니. 낙엽 청소를 어떤 식으로 하는지 학교 측에 물어보았더니 계속 떨어지게 놔뒀다가 잎이 다 떨어진 시점쯤에 기계로 낙엽을 쓸어 모아 포대에 넣고 이렇게 모인 수십 개의 낙엽 포대를 외부업체를 불러 차로 수거해가도록 한다고 했다.

 


지난주부터 아침마다 편한 차림에 장갑을 끼고 장대 싸리비를 들고 교문 앞으로 출근을 했다. 낙엽을 쓸어보니 싸리비와 시멘트 바닥이 마찰하면서 내는 '사각사각'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고 듣기 좋았다. 요란하지 않으면서 담백한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난생처음 싸리비를 잡고 낙엽을 쓸고 있었다. 한 번도 유심히 들어본 적 없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빗자루질이 서툴러 나도 모르게 팔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오른쪽으로 잡았다가 왼쪽으로 잡았다가 빗자루를 옮겨가며 쓸어보지만 아직도 동작이 몸에 붙지 않는다.


그래도 아침 낙엽 쓰는 일이 즐겁다. 내게는 사각사각 낙엽 쓰는 소리가 더할 나위 없는 진정 효과의 ASMR이고 명상음이다. 운이 좋으면 낙엽 쓰는 소리의 삼중주도 듣는다. 같은 시간대에 교문 건너편 식당 주인도, 울타리 너머 아파트 경비원 낙엽을 쓸고 있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낙엽을 쓰는 동안 춥지 않아 좋고 땀도 살짝 나서 몸을 데워준다. 시간도 빨리 간다. 진입로도 잠시나마 깨끗해진다. 쓸고 나면 실시간 진행되는 낙엽 현상으로 두어 시간 만에 언제 쓸었냐는 듯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버린다.


낙엽 청소 직후의 진입로(왼)와 3시간 후(오)


낙엽 쓸기를 하고 있으면 내 몸이 지난밤으로부터 완전히 깨어나서 최적의 활동 상태로 재생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 햇볕과 아침 공기 속에서 신체를 움직이는 일이 이토록 상쾌하고 활력을 돋우는 일이란 걸 오십 평생 모르고 살았다니...  


이제껏 30년 넘게 직장 생활하는 동안 나의 아침 몸 깨우는 방법은 뭐였더라? 수십 년간 반복된 평일 아침의 루틴은 '자가운전 출근 후 모니터로 뉴스 보며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이었다. 낙엽 쓸기는 몸에 강제로 진한 커피를 주유해서 카페인으로 나의 몸과 나의 하루를 각성시켰던 종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법이었다. 빗자루가 바닥을 스치며 사각거릴 때마다 뇌 속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다 깨어나며 '오늘 하루 내가 하려는 일에 몰두할 최적의 컨디션'으로 내 몸과 에너지를 새로 세팅해주었다.


낙엽을 쓸어 담으면서 보니 벚나무잎, 메타쉐콰이어, 은행잎과 느티나무잎이 주종이다. 저마다 연둣빛 새순으로 세상에 뚫고 나와 빛나는 여름을 살고 한해살이를 마감한 잎들이다. 이 잎들이 세 계절을 관통하는 동안 난 뭘 했을까?


올 2월 말에 퇴직한 나는 두 달간의 휴지기를 거치고 5월부터 지금의 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30년 넘게 내가 들어가 있었던 '교사&공무원'의 틀을 벗은 홀가분함도 잠시, 다시 학교로 와서 '교사도 아니면서 공무원도 아닌' 계약제 튜터 일을 하고 있다. 


은퇴는 했는데 일은 나가고 있다? 현재의 나는 몸은 직장에 나가지만 마음은 직장인의 결기가 없다. 관조하듯 여유롭게 내 할 일을 하고 있다. 일도 덤으로 얻었고 더불어 직장에서의 시간도 덤으로 누리고 있다. 이른바 나는 '마음은 은퇴자요, 몸은 자발적 시한부로 매여 있는' 반퇴자이다.


낙엽들이 나무에 매달려 어린 잎에서 어른 잎으로 자라고 씨앗을 만들며 부지런히 자기들의 생을 살아내는 동안 나는 어떻게 시간을 쓰고 살았는지 더듬어본다. 반퇴자로 지내면서 생각지 않게 브런치 작가 데뷔(?)를 했다. 내 개인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브런치 덕분에 여행기를 써보겠다고 난생처음 자발적으로 글을 쓰게 되었고 '몰입의 즐거움'에 행복해했다. 며칠 전 여행기가 30개가 되었다고 브런치에서 파일로 묶어 주는 바람에 무슨 책이라도 나온 냥 김칫국에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또 지인의 여행책 한 권을 만들어 주었고 우연찮게 마을 잡지 편집을 맡아 출판을 마쳤다. 주말마다 박물관 대학생이 되어 문화재 답사로 유적지 곳곳을 누볐다. 올봄부터 틈틈이 다녀온 제주여행도 결산해보니 올레길 1길부터 12길까지 제주도 반 바퀴를 내발로 꼬닥꼬닥 걸어서 다 돌았다. 낙엽의 찬란했던 한때처럼 막 푸르고 막 화려한 굴곡은 없었지만 인생 전반에서 후반으로 건너가는 이 강을 '반퇴자'란 모습으로 잘 건너가고 있는 이다.


낙엽의 종말은 무엇일까? 낙엽을 쓸어 담다 보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 뇌리를 스쳤다. 포대에 담긴 낙엽은 어디론가 여행해서 어디선가 태워질까? 그냥 산에 가서 버려질까? 어찌 되었든 유기물인 낙엽은 재가 되든 그 자체로 썩든 흙으로 되돌아가 다른 것들의 다음 생의 준비를 돕게 되겠지. 난 낙엽 일생의 마지막 가는 길을 거들고 있는 중이다.


며칠 전 퇴직한 옛 동료와 둘이 이야기 나눴다.

"은퇴해서 제일 좋은 점이 뭐야?"

"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되니까 좋아.'

나는 오늘도 내가 나한테 시키는 일만 하고 산다. 그래서 오늘도 낙엽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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