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시형 여행자인가 시골형 여행자인가. 작은 도시 과나후아토에서 울트라 대도시 멕시코시티로 가니 좋았다. 사람 북적이고 맛집도 많고 볼거리도 많아 덩달아 나도 에너지가 솟았다. 활기찬 기분도 잠시, 5일쯤 지내니 피로감이 들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고 매연 때문에 공기도 나빠 거리를 돌아다니면 머리가 아팠다.
지하철 판티틀란(Pantitlan)역에 철창 밖으로 사람들이 빼곡히 서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지하철 역사 안에 한꺼번에 사람이 몰리는 걸 막기 위해 입구 쪽에 줄을 세워 대기시키는 것 같았다. 그 장면을 보자 나까지 통제당하는 느낌이 들었고 하루빨리 멕시코시티를 벗어나고 싶었다.
드디어, 배낭 여행자들을 빨아들이고 눌러앉게 만든다는 마법의 마을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San Cristobal de Las Casas)'에 왔다. 실제로 멕시코 관광청에 의해 'Magicvillage'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예사롭지 않은 도시 이름부터 뭔가 있어 보이는 도시다. 줄여서 '산크리스토발'이라고 부르자.
우리 동양인과 너무 닮은 원주민을 마주칠 때마다 놀란다. 기와에 처마까지 우리나라 한옥과 비슷한 지붕이 많은 것도 신기하다.
산크리스토발의 시내버스인 콜렉티보. 시내와 근교 어디든 데려다준다.
산크리스토발은 첩첩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 같은 평지에 세워진 전형적인 컬로니얼 도시였다. 바둑판 모양의 도로변에 낮은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앉았다. 이곳에서는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어디서든 한 방향으로 돌고 또 돌면 원래 출발지로 돌아간다. 언덕길과 샛길의 미로 게임 같았던 과나후아토보다 훨씬 차분하고 평온하다. 다만 심심할 뿐이다.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의 장터에서 발견한 것
산크리스토발의 셋째 날, 재래시장(Mercado Jose Castillo Tielemans)을 찾았다. 시장은 상상 이상으로 규모가 크고 붐볐다. 분위기로는 베트남의 박하(Baca)의 로컬 시장이 연상되었다. 마야 후손이라는, 동양인 생김새의 원주민들이 다 시장에 나온 것 같았다. 원주민 거주 비율이 40%에 이른다고 한다. 여기가 멕시코가 아니라 중국 윈난의 소수민족 마을이거나 티베트 마을이라면 더 그럴듯한 풍경이었다.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의 재래시장(Mercado Jose Castillo Tielemans)
고산지역의 서늘한 기후 탓인지 멕시코의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던 잎채소들이 많아 반가웠다. 멕시코에서 생강과 쪽파도 처음 봤다. 앗, 열무도 있다! 순간 반가움이 흥분으로 옮겨가면서머릿속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열무로 물김치를 담가볼까? 마늘은 숙소에 있고 생강과 쪽파를 사자. 찹쌀가루나 밀가루가 없으니 풀물 대신에 생고구마를 썰어 넣으면 전분이 우러나서 발효되지 않을까.
열무와 99프로 닮은꼴 야채. 이름은 못 물어봄.
열무 두 단을 샀다. 숙소에 와서 다듬으면서 보니 생긴 것은 열무랑 거의 같은데 식감은 우리 열무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배추도 없고 무도 없는 이곳에서 이게 어디냐. 열무를 소금에 절여 건지고 고명 야채를 썰고 생수를 붓고 간을 맞추었다. 김치 맛은 이제 시간이 도와줘야 한다. '맛있게 익어라' 주문을 걸고 기다린다.
시장에서 구입한 열무김치 재료
숙소에 작은 통이 있어 열무김치를 나눠 담았다.
장기 해외여행과 한식의 상관관계
한국 떠난 지 5개월째 접어들었다. 그동안 무엇을 먹고 지냈나. 외국 여행 다니면서 '현지 음식을 먹는 즐거움'은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다니는 일이 일상이 되고 보니 먹는 것도 균형이 필요했고 나이도 나이인 만큼 어느 정도 집밥이 받쳐줘야 속이 편했다. 그러고 보면 음식은 '뿌리'이고 '안정감'이다.
유럽의 대도시는 베를린도 런던도 파리도 아시안마켓이 따로 있거나 동네 마트에 아시아코너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여행 초기라 김치나 라면이 딱히 생각나지 않아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다만 비가 오락가락하는 유럽의 3월에는 따뜻한 국물 요리가 그립기는 해서 쌀국수용 면을 사다가 국수를 끓여 먹기는 했다.
미국은 유럽과 비슷한 기본 외식비에 팁까지 더해져 유럽보다 식사비가 더 지출되었다.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 외에 사 먹을 것도 없었고 두 사람 한 끼 먹으면 유럽보다 식사 품질은 더 떨어지는데도 7~8만 원은 솔솔찮게 나갔다. 일정의 대부분이 자동차 서부여행이라 도시락도 싸야 했고 자연스럽게 직접 해 먹는 끼니가 많았다. 미국은 소도시조차 라이스페이퍼와 김, 햇반 등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월남쌈에 김밥까지 해 먹었다.
유럽과 미국 여행 중에 직접 차린 식탁(쇠고기야채구이, 볶음밥 도시락, 김밥과 월남쌈)
멕시코는 한식을 해 먹기 가장 어려운 나라이다. 김이나 햇반은 커녕 잎채소도 없고 좀 과장하면 야채라곤 고추와 고수밖에 없다. 더러 해 먹었던 브로콜리볶음과 양송이버섯볶음도 질렸다. 과달라하라와 멕시코시티에서 볼 수 없었던 한국식 식재료-열무, 유채 등의 잎채소와 생강과 쪽파 등-를 산크리스토발에서 만나다니 내 눈이 돌아갈 만도 하다.
미국이나 멕시코의 대도시 대형마트에 가면 우리나라 쌀과 비슷한 밥맛이 나는 스시용 쌀(왼)과 진간장(Kikkoman)(오)을 구할 수 있다.
이곳 산크리스토발은 기후가 좋다. 8월이지만 한낮은 덥지 않고 저녁엔 긴팔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시원하다. 숙박비와 외식 물가가 멕시코시티와 비교안될 정도로 저렴하다. 평화로운 스페인풍 거리는 어딜 찍어도 색감 강렬한 사진을 선물한다.
이제 열무김치만 맛있게 익으면, 산크리스토발을 '한달살기 최적 도시'로 한국인에게 주저 없이 추천하리라. 열무김치만 있으면 나도 여기,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눌러살 수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