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여행도 이제 막바지다. 60박째 잠을 자고 호텔 조식당으로 내려갔다. 멕시코 와서 호텔은 처음이다. 그동안 주야장천 에어비앤비만 이용한 터라 모처럼 남이 차려주는 조식이라니 눈이 번쩍 뜨인다.
조식 뷔페에는 빵이며 햄과 치즈 등 서양음식도 있었지만 멕시칸 코너에서 발이 멈췄다. 멕시코 사람들의 아침 식사 칠라낄레스(Chilaquiles) 재료가 놓여 있었다. 식당에서 아침 메뉴로 파는 칠라낄레스를 여행 초반에 먹어본 적이 있다.
소스를 끼얹어 눅눅해진 토르티야(Tortilla)와 매운 살사와 가루 치즈가 뒤섞여 나왔고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욱여넣다시피 먹었다. 멕시칸의 전형적인 아침 메뉴라는데 도무지 적응되지 않을 것 같은 음식이었다.
뭘 시켜도 꼭 나오는 토르티야
직접 칠라낄레스를 만들어 보았다. 구운 토르티야 조각에 치즈 가루, 양파채와 고수를 뿌리고 살사를 조금 끼얹고 호두 소스를 뿌렸다. 그리고 콩과 달걀 스크램블을 옆에 담았더니 시중 식당에서 아침 메뉴로 파는 칠라낄레스와 비슷한 차림이 되었다.
호텔 조식 코너의 칠라낄레스 재료들
멕시코식 아침 식사, 칠라낄레스
놀라운 건 맛이었다. 쌀밥에 콩나물국을 먹는 듯 '속 편한 맛' 그 자체였다. 두 달 동안 멕시코 여행하는 새에 나도 모르게 토르티야의 한없이 담백한 맛, 무미건조한 맛을 알아버렸나보다.
타코는 멕시코 어디서든 먹을 수 있고 동네마다 유난히 손님을 끄는 독보적인 타코집 한 둘은 꼭 있었다. 그래도 멕시코 와서 타코만 먹을 수는 없잖아. 모처럼 별러서 타코가 아닌 다른 메뉴를 시키면 내 보기에 타코와 딱히 다르지 않은 음식이 나왔다. 이렇게 말하면 멕시칸들이 서운해한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멕시코 대표 음식, 타코(Tacos). 손바닥만 한 토르티야에 고기와 야채, 소스를 얹어 싸 먹는 요리
께사디야(Quesadilla)를 시키면 치즈 넣어 반으로 접은 토르티야(Tortilla)가 나왔고 엔칠라다스(Enchiladas)를 주문하면 속을 채워 돌돌 말아 소스 끼얹은 토르티야가 나왔다. 식당에서 테이블에 앉자마자 살사소스랑 같이 제공하는 식전 주전부리, 토토포(Totopos)도 구운 토르티야 조각이다. 큰 접시만 한 토르티야에 고기, 야채, 콩 등을 넣어 돌돌 말면 휴대가능한 멕시코식 김밥 부리토(Burito)가 된다.
께사디야(Quesadilla, 왼)와 엔칠라다스(Enchiladas, 오)
토토포(Totopos, 왼)와 부리토(Burito, 오)
칠라낄레스나 께사디야, 엔칠라다스처럼 토르티야는 단일 메뉴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많은 요리에 있어 토르티야는 탄수화물 공급원이다. 닭고기나 돼지고기 몰레(Mole) 요리든, 수프 격인 포솔레(Pozole)든, 생선구이든, 스테이크든, 고추튀김(Chile Relleno)이든 뭘 시켜도 토르티야 한 바구니가 딸려 나왔다. 물론 무료에, 무한리필이다.
파히타 데 레스(Pajita de Les, 왼)와 칠레 레예노(Chile Relleno, 오)
포솔레(Pozole, 왼)와 몰레 요리(Mole, 오)
두 달간 옥수수를 주식으로
이제껏 지구인은 쌀 아니면 밀만 먹는 줄 알았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가본 나라의 주식은 쌀 아니면 밀이었으니까. 연간 강수량 1300mL 이상의 나라는 쌀을 주식으로 그 이하 나라는 밀을 주식으로 한다고 들었다.
쌀과 밀의 양대 주식 문화권을 거쳐 나는 이제 옥수수 문화권에 들어온 것이다. 두 달간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었다. 생존을 위해 현지 음식을 먹었을 뿐인데 나도 모르는 새에 내 몸은 세계관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직접 토르티야를 구워내는 식당도 많다.
옥수수는 쌀과 밀에 이은 세계 3대 작물로서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고 한다.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인디언들이 먹던 옥수수가 서구로 전파되었다고 하니 나는 진정 옥수수의 원조 대륙에 와 있는 셈이고 오늘날도 세계에서 옥수수를 가장 많이 먹는 나라에 와 있는 게 분명하다.
토르티야를 굽는 여인들. 툴룸(Tulum)의 거리 벽화
여행을 재밌게 하는 비결은 현지 음식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다. 멕시코 여행을 즐겁게 하려면 토르티야와 친해져야 한다. 이곳에서는 쌀이나 빵 요리는 제한적인 반면에 토르티야 응용 음식은 무궁무진하다. 토르티야 맛에 익숙해지면 음식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평생 쌀만 먹던 우리나라 사람에게 토르티야는 당연히 '낯선 맛'이다. 천천히 씹어먹으면 거칠지만 의외로 구수하고 담백한 토르티야의 맛을 발견할 것이다. 불행히도 나의 남편은 아직도 토르티야에 적응되지 않은지 빵만 찾고 있다. 그가 멕시코 음식의 즐거움을 모른 채 멕시코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동행 여행자로서 아쉬울 뿐이다.
여행지 한 끼 식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음식 한 접시는 현지인의 삶과 환경의 압축판이요 정체성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