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의 세계적인 휴양지 칸쿤(Cancun, Cancún)에 왔다. '카리브해의 해적' 때문에라도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카리브해에 드디어 발을 디뎠다. 칸쿤은 역설적이게도 멕시코 스러운 모습을 완벽히 걷어냄으로써 멕시코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다고 한다.
플라야 델 카르멘(Playa del Carmen)에서 버스를 타고 칸쿤 터미널에 도착했다. 호텔들이 모여 있다는 해변으로 가야 한다. 우버를 불러야 하나 고민하면서 터미널 밖으로 나갔더니 로컬버스인 콜렉티보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버스 창에 '호텔존'이라고 적혀있는 게 아닌가. 타고 보니 다들 현지인이고 관광객은 우리 두 사람밖에 없다. 고급스러운 호텔 타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에어컨 안 되는 낡은 버스였다. 요금 12페소(한화 1,000원)를 내고 무사히 호텔까지 왔다.
칸쿤 시내를 달리는 시내버스인 콜렉티보(Colectivo)
우리가 예약한 호텔은 이름하여, 올인클루시브호텔(All Inclusived Hotel).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식당과 바와 카페에서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포함된 호텔이라고 한다. 해변에서 놀다가, 바다와 맞닿은 수영장에서 놀다가 술이든 간식이든 다 그냥 받아먹을 수 있는 곳이라니. 이 환상적인 서비스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올인클루시브 호텔도 가격대가 층층이 있었지만 저렴한 축에 속하는 윈덤 그랜드 칸쿤(Wyndham Grand Cancun Hotel, 1박 40만 원)을 선택했다.
호텔 객실과 라군 전망의 객실 뷰
몇 년 전 쿠바에 갔을 때 휴양 도시 바라데로의 올인클루시브 호텔이 1박 17만 원 정도라 하여 묵어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연착되는 바람에 이용하지 못해 미련이 남았다. 그때 처음 알게 된 '올인클루시브호텔'이란 곳을 언젠가 한 번 이용해보고 싶었다.
호텔 수영장에서 수중 배구를 즐기는 숙박객들. 요일별로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았다.
이틀 숙박하는 동안 호텔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니 나갈 필요가 없었다. 호텔 안에 바다가 있고 수영장도 있고 객실에서는 바다가 메워져 석호가 된 라군도 보인다. 칸쿤의 카리브해변은 해변을 따라 늘어선 호텔들에 의해 조각조각 점유당하고 있었다. 돈만 지불하면 '바다 경관을 사유화'할 수 있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바다가 칸쿤에 있었다.
해변에 조성해 놓은 자쿠지
어쨌거나 해변이나 수영장에서 놀다가 선베드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거나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내면 되는 '별천지'였다. '모히토에서 몰디브 한 잔' 놀이를 하면서 빈둥거려도 시간은 잘 흘렀다.
너무 뜨겁고 습한 우기의 칸쿤 바다. 낮에 선베드에 누울 수가 없다. 다들 수영장에서만...
그래서 올인클루시브 호텔, 즐거웠냐고요? 호텔에서 하루 한 차례 수영을 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안 하고 보냈다. 그래도 머무는 내내 본전 생각이 났다. 이틀간 두 사람 합해서 캔맥주 한 개와 모히토 두 잔 마시고 하루에 수영장에서 한 시간도 못 노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올인클루시브는 과한 선택이었다. 우리에겐 그저 아담한 수영장 하나 딸리고 조식 나오는 조용한 호텔이면 충분했다.
바다는 눈요기용. 해변은 너무 뜨겁고, 파도가 세고, 해초 때문에 카리브해 바다 수영은 포기~
중년이란 나이 탓인지 성향 탓인지 몰라도 어딜 가도 '무지무지 신나는 건' 없었다. 좋은 호텔에서 고급 서비스를 누리니 오래간만에 아이들 생각이 나긴 했다. 애들이 같이 왔더라면 본전 생각날 틈 없이 기분 좋게 지냈을 것 같기도 했다.
습관(Habit) 보다 강한 제2의 본성 '아비투스(Habitus)'라는 용어가 있다고 한다.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취향으로서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고, 계층 및 사회적 지위의 결과이자 표현이라고 한다. '모처럼 별러서 온 최고급 호텔을 누리지 못하는 건 나의 아비투스의 한계 때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비투스는 돌에 새겨지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새로운 아비투스를 형성하려면 이런 행위를 반복해야 한다고 하니 그럴 만큼 돈도 없고 굳이 아비투스를 바꾸고 싶은 의지도 없다.
올인클루시브 호텔을 추천하냐고요? 어차피 여행이 돈 주고 경험을 사는 것이니 한 번쯤 즐겨보는 건 나쁘지 않다. 최대한 재밌게 맛있게 즐겨서 가심비를 끌어올리면 된다. 나의 여행 수칙에 의하면, '경험 안 하고 모르는 것보다는 경험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 다만, 올인클루시브는 배낭 메고 콜렉티보 타고 다니는 우리에게는 맞지 않은 숙박 스타일이란 걸 알았다. 현지인들과 뒤섞인 퍼블릭 비치가 딱 우리 취향이다.
호텔 안의 식당에서 7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노부부 한 쌍과 합석하게 되었다. 내가 먹는 메뉴 이름을 묻길래 '파히타 데 레스(Fajita de Res)'라고 알려드렸다. 속으로 멕시칸 같아 보이는데 멕시코 음식 이름을 왜 내게 묻나 의아했었다. 음식 주문하는 모습을 보니 두 분 다 스페인어가 유창했다. 뒤늦게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에쿠아도르에서 왔다고 했다. 스페인어를 쓴다고 다 멕시칸이 아닌데...
웨이터가 포크를 가져다주지 않았길래 내가 포크 두 개를 받아 그분들께 전해드렸다. 키토(Quito)에 살고 있고 딸과 함께 왔다고 했다. 다음 달에 우리도 키토에 갈 거라고 했더니 할머니께서 꼭 연락하라며 전화번호와 이름을 알려주셨다.
체크아웃하면서 객실 냉장고에 있는 캔맥주 하나씩을 각자 배낭에 챙겨 넣었다. 이로써 2박 3일간 우리가 소비한 음료는 무려 '캔맥 3개와 모히토 두 잔'이 되었다. 숙박은 '가성비 꽝'이었지만 에쿠아도르 현지인 지인을 건졌으니 보상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덕분에 브런치 글감도 건졌고!
10개월의 일정으로 떠납니다. 유럽-미국-중미-남미 순으로. 생활여행자의 시선으로 여행을 담아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