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가려던 여행지 쿠바가 취소되었다. 쿠바 여행을 접은 건 순전히 미국 때문이다. 뭐? 이제는 미국이 하다 하다 개인이 여행 가는 나라까지 간섭한다고? 진짜다. 미국은 미국인이 쿠바를 못 가게 하는 데서 성이 안 차 이제는 남의 나라 국민까지도 쿠바를 못 가게 하는 나라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이 쿠바를 테러 지원국으로 재지정(2021년 1월 12일, 2015년 오바마 재임 시절 잠시 제외된 적이 있음.)하면서 쿠바를 다녀온 사람은 미국 전자여행허가증(ESTA, 이스타) 발급이 안되고 정식 비자를 받아야 미국을 방문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미국여행이 불편해지는데 그치는 게 아니다. 공항 환승이 목적일 때 72시간 무비자를 허락하는 대부분의 나라와 달리, 미국은 자국 공항의 단순 환승에도 이스타를 요구한다. 자기 나라 땅에 발을 딛기만 해도 사전에 허가를 받으라는 것이다. 이스타 발급이 안된다는 건 미국을 경유하는 비행기를 못 탄다는이야기니 우리나라에서 중남미까지 직항이 없는 현재 상황에서 이만저만 심각한 게 아니다.
미국과 쿠바의 애증 관계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제3국 소시민의 여행 일정까지 좌지우지하다니. 경제난을 탈피하기 위해 '관광 개방'이란 장돌을 하나 들고 이제 겨우 숨통을 틀려고 하는 다윗 쿠바의 숨줄을 끊기를 서슴지 않는 골리앗 미국은 과연 이름처럼 '아름다운 나라'인지 의심스럽다.
한 달간 가 있으려던 쿠바 여행이 취소되면서 얻은 대체 여행지는 과테말라였다. 과테말라 유일의 국제공항인 과테말라시티 라 아우로라(La Aurora) 공항으로 들어갔다.
이게 무슨 일?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과테말라는 나를 격하게 환영해 주었다. 공항 곳곳에 한글 안내판을 붙여놓고 생각지도 못한 환영 세리머니를 하는 게 아닌가. 놀랍게도 공항의 모든 안내판은 자국어인 스페인어와 영어, 한국어로 병기되어 있었다. 과테말라 시티 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한국친화적 공항이다.
우리나라 공항인 줄... 과테말라시티 공항
프랑스 파리의 지하철에는 한국어 방송이 나온다. 실제로 관광지 주변 전철역에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한국어 방송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중국어와 일본어 안내도 나온다. 그러나 과테말라 공항엔 한국어뿐이다. 160여 개의 한글 안내판 외에도 출입국 서류 작성 한글 견본도 17군데나 비치되어 있다고 한다.
과테말라에 우리 교민은 5천여 명, 연간 한국인 방문객은 1만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공항에 한국어가 표기되게 되었을까? 우리 정부가 과테말라에 공항 분야 연수를 제공하고 마스크를 기증했고 현지 한국 대사관이 과테말라 민간항공청과 협의해 성사시킨 '우호 교류'의 결과라고 한다.
아카테낭고 화산 투어에서 만난 독일 여행자는 과테말라시티 공항에서 한글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공항은 그 나라의 얼굴이다. 과테말라시티 공항을 이용하는 연간 300만 명의 세계인이 한국의 위상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과테말라 공항에 갈 일이 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로 가는 '한 달 남미 여행'의 국민 루트는 '페-볼-칠-아-브 5개국, 반시계 방향(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이다. 여행 기간을 조금 더 길게 잡는다면 과테말라를 추가해봐도 좋겠다.
과테말라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남미 대륙을 총괄하던 총독부가 있었던 옛 수도 안티구아가 있다. 안티구아는 물의 화산(Volcan Agua), 불의 화산(Volcan Fuego), 아카테낭고(Volcan Acatenango), 파카야(Volcan Pacaya)로 둘러싸여 있다. 화산에서 나는 스모키한 향의 커피도 유명하다. 체게바라가 들렀다가 '혁명을 멈추고 싶다'라고 말했다는, 화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호수, 아티틀란(Atitlan)도 인기 관광지다.
안티구아 시내 북쪽 십자가의 언덕에서 바라본 안티구아 전경
아구아 화산의 일출
용암을 분출하는 활화산, 푸에고 화산
화산쇄설물의 능선이 장관인 파카야 화산
산 페드로와 아티틀란 등 세 개의 화산으로 둘러싸인 호수 아티틀란
과테말라에 가면 어김없이 만나는 도로 위의 마스코트, 치킨 버스도 빼놓을 수 없다. 과테말라 사람들의 생활 예술의 결정체다. 미국 스쿨버스를 가져와 칠하고 그림 그려 주요 여객 수단으로 쓴다.
치킨 버스는 미국 지프차를 개조한 필리핀의 지프니를 연상시켰다. 시장에서 산 생닭을 함께 실어 치킨 버스라고도 하고, 닭장 같아서 치킨 버스라고도 한다는데 유래는 아무래도 좋다. 시내는 물론 근거리 시외를 촘촘하게 연결시켜 주는 치킨 버스를 타고 과테말라 여행 어떨까.